연말 다 됐는데 개헌 논의는 어디로 새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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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다 됐는데 개헌 논의는 어디로 새 버렸나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8.11.1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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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다’는 레토릭은 이미 진부해져 버린 지 오래지만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게 정치인들의 약속이란 건 내 평생 살아오면서 신물 나도록 겪어온 바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는 말일랑 한 귀로 듣고 한 귀를 흘리면서 깡그리 잊어버려야 마땅하건만 또 그게 그렇게 되지 않은 건 그들이 맡은 일이 나 같은 장삼이사를 포함해 국민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헛 약속을 기억나대는 대로 죄다 옮기자면 밤 새워 읊어도 부족할 지경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갑갑증이 나는 걸 내게 딱 하나만 들라면 ‘개헌’이다. 지난 봄 문 대통령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개헌을 주창했지만 지방선거와의 동시투표가 좌절된 후론 말이 없다. 시간을 주면 국회 주도로 연말까지 개헌에 나서겠다던 자유한국당도 꿀 먹은 벙어리다. 5년 단임인 대통령 임기를 포함한 권력구조 개편에다 국민기본권 강화, 지방자치 활성화 등등 그렇게 손 볼 게 많다고 그때는 그렇게 시끄럽더니 다들 왜 이리 나 몰라라 시치미를 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돌아가는 꼴로 봐선 연내 개헌은 고사하고 다음 총선 때도 성사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를 하자며 개헌안을 발의한 게 지난 3월 26일이다. 야당의 극심한 반발 속에 5월 24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자유한국당 등 일부 야당이 불참해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조차 하지 못하고 폐기됐던 것은 다들 기억할 거다. 당시 대통령발 개헌안을 좌절시켰던 야당이 내건 명분은 ‘개헌이 지방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 자유한국당은 당시 ‘문재인 관제개헌 저지 및 국민개헌 선포’ 기자회견 등 장외투쟁까지 벌였다. 그들은 대신 국회 주도로 연내 개헌을 내세웠던 터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연내’가 한 달 반쯤밖에 남지 않았다. 대통령더러 개헌에 나서지 말라, 국회가 알아서 올해 안엔 개헌 작업을 마무리하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던 국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개헌 주도를 막기 위해 엉겁결에 내놓은 약속이라는 걸 그때도 눈치 채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개헌 문제에 관한 한 꿀 먹은 벙어리인 여야 정치권을 지켜보자니 열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금쯤이면 하다못해 국회 내에 개헌특위를 구성하려는 협상쯤은 여는 시늉을 해야 하지 않나. 그것도 아니라면 “연내 개헌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하다. 가능한 대로 빠른 시간 안에 논의에 나서겠다”고 국민에게 사과라도 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싶은 거다.

대통령도 마찬가지. 연초에 그렇게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6·13 지방선거와의 동시 투표’를 주창하지 않았었나. 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개헌안을 발의하기까지 했던 터다. 그렇게까지 했으면 그만큼 개헌이 절박하다는 의사 표현이었을 텐데 왜 이제는 한마디 언급이 없는지 모르겠다. 개헌안을 내놓았지만 야당이 반대했으니 난들 어쩔 수 없다, 이제 난 모르겠다는 걸까.

다들 아시는 대로 현행헌법의 개정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직선제를 시행하려고 서둘러 고친 헌법이지만 시대정신으로 따져도 큰 하자는 없었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필두로 헌법재판소가 설치됐으며, 복지와 인권이 보강되고 경제민주화 조항도 미흡한 대로 일부 들어갔던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 헌법으로 30년을 버텨왔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 커졌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으니 이젠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장만해야 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특히 5년 단임제를 규정한 대통령 임기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나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4년 중임제든, 6년 단임제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는 시기적으로 짝이 맞아야 한다.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을 거쳐 최장 8년 정도 보장해서 대통령이 소신 있게 국정을 이끌고, 국회의원의 임기와도 짝을 맞추는 차원에서라도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게 그 동안 나온 주장이었다.

그 뿐도 아니다. 국민 기본권, 지방자치 활성화, 경제 민주화 등등 현행 헌법이 제대로 담지 못한 시대정신을 재충전하기 위해서라도 개헌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었던가.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만큼 헌법적 근거를 명확히 해서 지방자치제의 확대를 서둘러야 하고, 재벌과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 관련 조항을 현행보다 확충할 필요도 일찍부터 제기돼 왔던 터다.

국민기본권도 마찬가지. 생명권이나 안전권은 세월호 사건이나 각종 대형 재난을 겪었던 국민이 요구하는 바다. 주거권, 건강권은 국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로 21세기형 문명국가라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 아닌가. 정보통신 분야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국민의 정보 활용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만큼 정보기본권도 손질해야 한다. 나아가 남북 화해 국면에서 남북 교류에 장애가 되는 요소도 개헌을 통해 손질해야 한다.

법률이나 주요 국정 행위는 결국은 헌법에 의거해야 하는 만큼 급변하는 21세기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헌법 개정은 화급한 일이라는 것 자체에는 여야 정치권이 다들 동의하고 있질 않나. 그런데도 왜 개헌의 ‘개’자만 나오면 곧바로 정쟁거리가 되는 걸까.

그 이유는 다들 알고 있다. 그게 여야의 정치적 이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를 손질하자면, 이게 현임 대통령의 정권 연장 기도가 깔려 있지 않나, 차기 대권주자들의 입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거다. 경제민주화를 하자면, 이제 우리 당의 득표에 도움이 되나, 안 되나 표계산부터 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제의 강화를 하자면 중앙 정치권의 권력 축소로 이어지지 않나 따지고 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개헌 논의가 나올 때마다 시끄럽기만 했을 뿐 실제로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에 4년 중임제 개헌안을 내세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노 전 대통령은 4년 중임제를 실시해도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박근혜 씨 등등 야당의 유력 후보군이 반대하는 바람에 개헌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쑥 들어갔다. 차기 대권은 떼놓은 당상인데 왜 헌법을 개정한다면서 우리 입지를 흔들려 하느냐, 국민 관심을 대선 국면에서 개헌 국면으로 돌리려는 꼼수 아니냐고 의심했지 않았던가. 개헌이 벽에 부닥치자 노 전 대통령과 야당 후보들은 “다음 대통령이 나서서 개헌을 추진한다”는 약속 아닌 약속으로 슬쩍 봉합했지만, 당시에도 그 헛말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박근혜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개헌의 ‘개’자도 꺼내지 않아 공염불이 된 건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 마디. 경제와 북핵문제로 골치 썩이는 줄은 알지만 대통령도 자신의 말을 책임지는 차원에서라도 개헌 엔진에 시동을 다시 켜야 하지 않나 싶다. 남북문제는 남북문제이고, 경제는 경제이고, 개헌은 개헌이다.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을 둘러싸고서도 그게 비준 사항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들이 많았고, 위헌 시비로까지 번지면서 결국 비준이 무산되지 않았던가. 그 하나만 놓고 봐도 개헌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다.

이번엔 대통령 주도로 성급하게 개헌안을 발의하기보다는 국회에 일단 채를 넘겨주되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면 어떨까. 국회에서의 개헌특위를 빨리 구성하도록 촉구하고, 정부 차원에서 지원도 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도 따로 개헌안을 연구해 볼 수는 있을 게다. 명심할 것은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되는 임기 후반부에 개헌을 시도해 봐야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거다. 노무현 정권 때의 경험이 생생하지 않나.

야당도 마찬가지. 지금 자유한국당의 사정을 보면 제 코가 석자이고 당내 쇄신도 못해서 쩔쩔매는 처지란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당내 사정은 당내 사정이고 국가의 백년대계는 백년대계다. 책임 있는 정당이라면, 제 입으로 연내 개헌에 나서겠다던 연초의 약속을 지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국회 내 제 정파들과 협의해 우선 개헌특위라도 가동시켜야 한다. 제발 당리당략에 휘둘리지 말고 나라의 기틀을 정비하는 데 힘을 합칠 일이다.

시간표로 따지면, 내후년 4월에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진다. 1년 반쯤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개헌특위를 가동해 준비에 나선다 해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이 진짜로 개헌할 의지가 있다면, 지금부터 다시 협상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늦어도 내년 초엔 개헌 논의가 본격화돼야 한다. 만약 지금을 놓친다면, 개헌은 문재인 정권에선 물 건너가고 만다. 그러면, 또 다음 정권에서 똑 같은 소리를 반복할 건가. 지겹지도 않나. 대통령과 여야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샅바 싸움을 하는 동안 나라의 경쟁력은 좀먹어 가고 국민의 행복도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제발 정신들 좀 차리고 밥값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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