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생존 학생들 트라우마...자살기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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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 학생들 트라우마...자살기도도 있었다
  • 취재기자 이슬기
  • 승인 2015.04.11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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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부모 간담회, "테러리스트 되겠다는 아이 말리느라 혼났다"
▲ 세월호 생존자 부모들이 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있다. 왼쪽부터 사회자 이현우 씨, 박재혁 씨, 김야실 씨, 이혜선 씨, 박윤수 씨가 앉아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슬기).

4월 10일 세월호 참사 1주년을 앞두고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에 위치한 카페 헤세이티에서 생존자 부모들의 간담회가 열였다. 간담회와 함께 노란 리본 판매와 인양 촉구를 위한 서명을 하는 공간도 마련이 돼있었다. 어제 울산 간담회를 마치고 두 번째 간담회에 참석한 상태라, 부모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담회는 예정된 7시보다 조금 늦게 진행됐다.

이번 간담회에는 4명의 부모가 참석했다. 2학년 1반 박소희 양의 아버지 박윤수 씨, 6반 김승재 군의 어머니 이혜선 씨, 4반 위득희 군의 어머니 김야실 씨, 5반 박준혁 군의 아버지 박재혁 씨, 이렇게 4명의 부모들이 간담회를 위해 부산을 찾았다. 간단한 부모 소개로 간담회는 시작됐다.

먼저 라디오 여성시대에 이혜선 씨가 보낸 사연을 들으면서 간담회가 시작됐다. 라디오에서는 생존자 학생들의 합숙소 생활부터 첫 등교, 현재 악플에 대한 상황, 냉랭한 네티즌들의 반응, 현재 보상 상황 등이 이야기됐다. 라디오에 이어 첫 말문을 이혜선 씨가 열었다.

이혜선 씨는 라디오에 이야기를 실은 사연을 얘기했다. 이 씨는 “1주년이 다 되어 가니까 생존자 아이들이 많이 아파하지만, 모든 국민들은 희생된 아이들, 즉 유가족들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은 길에서 깔깔거리고 장난치며 다니는데, 저희 아이들이 그렇게 다니면 쟤들은 살아서 와서 낄낄거리고 웃는다고 사람들이 욕했다”며 “사람들이 이렇게 모르니까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다가 여성시대 MC 두 분을 믿고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이혜선 씨는 “아이들은 가장 추억이 많아야 할 고교 생활을 통째로 잃었다. 같이 뛰놀던 친한 친구들을 다 잃었다. 아이의 원래 꿈은 해경이었다. 근데 해경은 단 한 친구도 구조해 주지 않았다. 요즘 아이가 ‘공부는 해서 뭘 하나, 나는 꿈이 없다’고 말한다. 생존자 부모님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는 못한다. 그저 내 옆에서 숨 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혜선 씨는 언론의 문제점도 언급했다. 이 씨는 “요즘 방송이나 언론사를 보면 선채인양을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말을 바꾸며 검토하겠다고만 한다. 해수부에서 인양하는 걸로 발표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 가족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한을 풀어주려면 선채를 인양해서 내 친구들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왜 한 명도 구조를 못했는지, 왜 살려주지 않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걸 밝히는 것만이 우리 아이들이 온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며 선채 인양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이 씨는 배상에 대한 점도 언급했다. 이 씨는 “정부에서 시행령 발표할 때 정신적 치료는 5년밖에 못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6-7년 후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럼 그 치료비는 우리 부모들이 고스란히 안고 가야 된다. 또 승재(아들)는 두피에 이상이 있어서 계속 병원을 다닌다. 이 치료는 1년밖에 안 해주는데, 그럼 아들이 군대를 다녀오기 전 모두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돈도 필요 없다. 단지 아이들이 안전한 나라에서 사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사건이 있고 1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극단적인 생각을 할까 봐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 아이가 혼자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확인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위득희 군의 어머니 김야실 씨가 입을 열었다. 김 씨는 “친구 250명이 바닷속에 그대로 잠겼다. 수학여행을 보내고 새벽에 군산 앞바다 사진을 보내왔을 때까지는 괜찮다고 문자가 왔다. 근데 일요일 아침 성당에서 신부님의 말을 듣고 배가 침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금 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전원이 구조됐다는 뉴스가 났지만 다 오보였다”고 말했다.

또 김 씨는 “친구들이 물속에서 나오지를 못하니까 그때부터 아들이 화가 많이 나있었다. 딴 맘을 먹을까 봐 계속 지키고 있는데, 연수원에서 아들이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걸 말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항상 자고 있으면 살아있나 만져보았다. 생존자 남자애들이 35명인데, 화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몸을 혹사시킬 만큼 강렬하게 축구를 하면서 화를 해소하더라. 얘들이 딴 맘을 먹어서 잘못되면 어떡하지 항상 걱정했다”고 토로했다.

박준혁 군의 아버지 박재혁 씨가 세 번째로 입을 열었다. 박 씨는 “사고 당시 준혁이는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벽에 기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라는 말밖에 없었다. 두 번째 물이 찰 때는 물이 가슴 정도까지 왔다고 했다. 그때 창문을 봤는데 창문 밖에는 해경 배가 오고 창문에 있던 아이들이 창문을 향해 살려 달라 소리쳤지만 해경이 그 모습을 보고 지나갔다고 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준혁이도 그걸 보고 옆에 있던 여자 친구를 잡고 나오려 했지만, 세 번째 물이 침범해 들어올 때 여자 친구를 손에서 놓쳤다. 헤엄쳐서 나오는데 그때는 천장과 물이 닿을 정도로 물이 찼다. 그때 당시에 아이들이 잠수를 해서 나가야 하는데, 구명조끼 때문에 몸이 계속 뜨니까 못나갔다. 그래서 벽을 발로 밀고 다시 잠수를 해서 나와야 했는데, 그때 머리를 부딪치며 나왔다. 아들은 그때 한 번만 더 부딪쳤으면 못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 씨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는데 지금의 생존자 아이들은 그냥 나온 아이들이 아니다. 대부분 눈앞에서 친구들이 휩쓸려가는 것을 보고 나온 아이들이다. 예전과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아이를 보면 힘들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아이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괜찮겠구나 생각한다. 우리는 아픔을 가진 자식을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 근데 모르는 사람들은 이제 그만해라 세월이 지나면 다 나을 것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아이들이 바라는 진실규명을 위해 여러분이 도와야 한다. 죽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라며 “같이 응원해주시고 SNS에 나쁜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다음으로 박윤수 씨가 1년 동안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박 씨는 “소희는 올라올 때 많이 다쳐서 올라왔다. 왼쪽 다리에는 반 깁스를 하고 골반은 돌아가 있는 상태에 척추는 디스크 바로 전 단계였다. 병원을 총 아홉 개를 다녔는데 정신의학과 치료만 적게는 25만 원 많게는 33만 원까지 나온다. 지금의 시행령을 폐기하지 않으면, 애보고 다시 죽으라고 하는 것이다”고 현재 시행령의 문제점을 말했다.

박 씨는 “12월 21일 날 우리 아이가 자살기도를 했다. 막내에게 전화가 와서 갔더니 교복을 깔끔하게 입고 아이들 명찰을 다 달고 유언장 8장을 써놨었는데 3장밖에 못 읽겠더라”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또 “총 45일 입원을 하는 동안 24시간 보호자가 붙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우리한테는 혜택이 없었다”며 “유가족들과 저희하고 갈 길은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다. 선채인양과 진실규명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므로 꼭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 부산 중앙여고 학생들과 세월호 생존자 부모님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슬기).

박 씨는 “아이의 페북에 못된 말들이 많다. 또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하는지 그런 것들에 아이들은 엄청 힘들어한다. 그중에는 일베도 있다”고 말했다. 또 박 씨는 “학교로 편지를 많이 보내달라”며 “아이들이 응원 편지에 힘을 많이 얻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승제 군의 어머니 이혜선 씨는 “처음에 75명의 생존자가 나왔을 때 제일 가슴 아픈 소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말 안 듣고 불량한 아이만 살아남았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김 씨는 “희생자 친구의 동생들은 부모님이 세월호 사건 일로 나가계시면 집에 혼자 남는데, 그 아이들을 우리 생존자 아이들이 돌봐준다. 생존자 아이들은 스스로도 많이 힘들 텐데 친구의 동생들을 돌봐주는 착한 아이들이다”라고 말했다.

또 이 씨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왔을 때 최소한 교육감 정도는 아이들 보러 왔을 것 같지만 아무도 안 왔다. 연수원에 교육청 직원들이 딱 열흘 있다가 철수했다. 그리고 우리끼리 있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간식을 주는 사람도 없어 내가 학교에 연락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간식을 넣어 달라고 요청했었고, 연수원에서 4개의 반으로 나뉘어 공부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엄마들이 간식을 준비해서 줬다. 우리는 구걸해서 우리 아이들 간식과 음료수 줬다”며 “사람들은 ‘살아왔으면 됐지’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 씨는 “나는 ‘대통령은 왜 안 오나요? 하다못해 국무총리는 왜 안 와보나요? 그럼 교육감이라도 오라고 하세요. 우리 아이들한테 살아와줘서 고맙다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며 “결국은 여러 방송국에 연락이 되었고 이렇게 지내는지 몰랐다며 방송 쪽에서 아이들 있는 동안 간식을 풍족하게 넣어 줬다”고 말했다.

이 씨는 “왜 1년이 된 지금에서야 나와서 이러는지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우리는 아이들 때문에 참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참은 이유는 아이가 공격을 받으니까, 내 아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흔히 일베충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좋은 말을 한마디도 안 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제는 나설 때가 된 것 같아서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살아서 온 아이들이 죄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꿈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또 “우리는 대학 특례를 원한 적 없다. 본인들이 해주겠다 해놓고 나중에는 가족들이 요구했다고보도한다”며 “우리 아이들이 치유가 되려면 희생자 친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진실을 밝혀줘야 한다. 우리 아이들 75명 아들딸이라 생각하시고 우리 아이들 한 좀 풀어주자”고 말했다.

박소희의 아버지 박윤수 씨는 “사고 전에는 친구도 많고 활발했는데 지금은 성격이 내성적으로 많이 변했다. 잘 표현을 안 하고 처음 사고가 났을 때는 말을 아예 안 했다”고 말했다.

또 박 씨는 “소희가 구조 당시 마지막으로 구조된 것이라 온갖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또 그때 당시 소희가 진도병원에 있을 때 지금도 현 국회의원인 보좌관이 작품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박 씨는 “소희의 깨진 핸드폰을 방송에서 많이 보셨을 것이다. 사실 그 영상은 소희의 동의 없이 보도된 것이다. 그걸 어떤 기자가 고쳐주겠다고 가져가서 동영상을 자기 휴대폰으로 찍어 가져간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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