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이미테이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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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이미테이션 게임’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김가희
  • 승인 2015.03.30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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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고

 알고 보면, 우리는 참 많은 수수께끼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항상 버릇처럼 답을 내리려 하지만 때로는 그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이성인가, 감성인가? 개인인가, 사회인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하는 문제들이 그렇다. 혹시 이 질문들에 대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답은 더욱 모호해진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는 추축국 진영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연합국 진영의 영국, 프랑스, 미국 간의 대립각 속에서 시작된다. 영국은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해 고전을 겪고, 날이 갈수록 영국군의 피해는 커져간다. 당장 시급한 암호 해독을 위해 특별히 꾸려진 팀이 있다. 명성 높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이 그 팀의 일부가 되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다. 앨런은 기존 방법을 무시하고 장기간에 걸쳐 암호해독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인공지능 컴퓨터는 1,400만의 목숨을 살렸고 현시대 컴퓨터의 모태가 됐다. 이 과정 속에서 앨런 튜링의 인간적인 고뇌와 빛났던 그의 천재적 능력이 재조명된다.

천재적 능력을 지닌 앨런 튜링의 잘난 일대기를 그저 방관하며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한 인간이 가진 아픔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독기계로 영국군의 작전 방향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그에게도 숨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모두의 만류에도 병적으로 기계에 집착하는 장면들은 왕따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는 동성애자라는 당시 크나큰 약점을 숨기면서 스스로 약해지지 않기 위해 겉으로 더 차갑고 단단해졌다. 어쩌면 종전(終戰)에 직접적인 역할을 해낸 엄청난 업적에 반해서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의 생활은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동성애를 인정할 수 없었던 시대와 철저한 외로움이 한때 천재였던 그를 결국 자살로 몰고 간다. 영화를 통해 벌거벗겨진 한 천재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초라함을 남길 뿐이다. 뒤늦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의 화려한 업적에도 박수보다 어딘가 모를 씁쓸함이 앞선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뼈아픈 시대적 상황은 앨런 튜링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이야기 전체에 집중하게 한다. 암호해독에 성공하면 모두 끝날 것만 같았던 이야기는 선택의 기로에서 다시 시작된다. 독일군의 메세지를 파악해 그들의 전략을 모조리 피해가면 독일은 새로운 암호체계를 만들어 낼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계산을 통해 때에 따라 아군을 살리고, 또 때에 따라서는 아군이 당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봉착한다. 그때 팀원 하나가 앨런에게 사정한다. 자신의 형이 타고 있는 함정이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암호해독의 기쁨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고, 바로 고뇌가 맞닥뜨렸다. 그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독일군의 공격을 지켜보는 것이었고 그릇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모두가 슬픔에 잠기게 된다.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어떻게 인간이 결정할 수 있을까? 사실 그 어떤 윤리적 잣대로 견준다고 해도 이것은 인정될 수는 없다. 하지만 허용될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 그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이다. 희생 앞에서 체계적인 계산이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현실 때문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어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는 전쟁의 끔찍한 이면 탓이다. 계속되는 공격과 희생 장면을 보며, 나는 질끈 눈을 감게 됐다. 영화 속에서라도 나는 모든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를 바랐다. <이미테이션 게임>을 포함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이처럼 더 오랜 여운을 남긴다.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던 아픈 역사를 먼 이야기처럼 간과할 수 없는 이유에서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여러 가지의 핵심을 나열하면서도 난잡하지 않게 끝까지 주제를 안고 간다.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한 개인의 모습이나 천재 수학자로서 동성애라는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 동료이면서 여자이기도 한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와 갈등을 빚는 모습들은 참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영화는 그 속에서도 앨런 튜링이라는 한 인간을 시대상에 맞게 재해석하며 묵직한 메세지를 던져준다. 영화는 그저 담담한 몇 자의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앨런의 죽음과 사후 재평가된 업적은 쓸쓸했던 한 인간과 겹쳐지며 그렇게 막을 내린다.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었어요. 바로 당신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아무도 생각 못 한 일을 해내곤 하지.”

이들은 조안이 엔딩 장면에서 낮게 읊조리는 대사이다. 이는 조안이 위대하면서도 고독했던 앨런에게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며, 위대한 앨런 튜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세상에 던져진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들고 온 세상의 물음표를 다시 생각하게 해볼 뿐. 앞선 질문에서 분명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떤 위대한 답을 발견하기보다 앨런 튜링의 인생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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