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절망의 나락서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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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절망의 나락서도 버텼다"
  • 취재기자 임동균
  • 승인 2014.11.25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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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의 인생을 살아온 청년창업발전소 대표 장희영 씨 이야기
▲ 카페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있는 장희영 대표(사진: 취재기자 임동균).

장희영(32) 씨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시빅뉴스와의 인터뷰 도중에도 연신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청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회사 ‘청년 창업 발전소’ 대표, 운동 기구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홈피트 코리아’의 수출 담당 부대표, 한국의 동양화를 해외에 수출하는 ‘아트 매니저’가 그의 명함에 적힌 직함들이다.  30대 초반의 여성으로선 범상치 않다. 하지만 장 씨의 인생 내력을 들으면 그 직함들이 주는 아우라가 오히려 사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장씨가 철든 이후 걸어온 10여년의 역정은 드라마틱했다.  장희영씨는 “내 인생은 마치 롤로코스터 같았다”며 운을 뗐다.

그녀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다. 한창 사춘기의 장씨에게 예고 없는 가난이 찾아왔다.  교복조차 사 입을 수 없을 만큼 집안이  기울었다. 한 순간 가난뱅이의 딸로 전락했다. 그녀는 돈이 없어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난이 부끄러워 친구 사귀기도 꺼려졌다. 그녀는 “돈이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떡볶이 한 접시조차 사먹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지독한 가난은 그녀를 인생이란 롤로코스터의 탑승구로 안내했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본 그는 대학 입시공부를 손에서 놓게 된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때 꼭 내가 사업으로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리라 다짐했다”고 말했다.

평소 수업 시간엔 사업 아이템 구상을, 야간 자율 학습시간엔 대학생들도 어려워하는 경영학을 독학했다. 언젠가 사업에 필요할 것 같아, 영어와 일본어도 공부하며 자신의 스펙을 키워나갔다.

고교시절이 끝나갈 무렵, 담임은 평소 모의고사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그녀를 일류 대학을 보내고 싶어 했다. 여러 차례 담임과 학생주임의 설득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꿈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담임 교샤와  학생 주임 교샤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수능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쌈짓돈을 들고 시장조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장 대표는 “그때, 이 악물고 부모님과 연락도 끊고 일본으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20세의 어린 여성에게 세상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간 지 6개월 만에, 그녀는 가지고 있던 쌈짓돈을 모두 털어먹고,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녀는 “당시 큰소리치고 갔다 왔는데 내 호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자, 부모님 볼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꼭 성공하겠다는 꿈과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녀는 꿈을 잠시 접어두어야 만했다. 장 대표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기쁨을 드리고자 어버이날 선물을 살 목적으로 마트 판촉 일을 시작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뜻밖의 기회가 됐다. 그녀는 12시간의 근무 시간 내내 쉴 틈도 없이 물건을 팔아서 마트에서 판매량 1등을 차지했다. 그녀는 “그땐 진짜 눈에 독기가 올랐다”며 그때 당시의 열정을 말했다. 그런 독기가 몇 개월이 지나자, 마트 측에서 팀장 스카웃 제의가 들어 왔다. 그녀는 짧은 시간만에 마트의 판촉 팀장으로써 많은 경험을 쌓았다. 마트 판촉 일을 하는 가운데, 그녀의 눈에 용역업이 좋은 사업 아이템으로 눈에 들어 왔다.

그때부터 장 대표의 인생 롤로코스터는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녀는 용역업체를 차리고 마트에서의 노하우와 남다른 감각으로 빠르게 업계에 적응해 나갔다.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그녀의 초보 직원은 순식간에 베테랑으로 변했다. 그녀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그렇게 사업하기를 몇 년, 장 대표는 “어느새 내 손엔 3억이 들어와 있었다”며 “그동안 자신의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볼 시간도 없이 일에 전념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과거 설움이 떨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용역업은 최종 사업체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업으로의 변화를 생각했고, 곧바로 그녀는 용역업체를 남에게 넘기고 외식업, 컨설팅, 심지어 세차장까지 하면서 사업을 키웠다. 하는 일마다 잘 됐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찾아 일을 벌였다. 장 대표는 “3년에 1번은 꼭 두 가지 새로운 사업을 해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최종 사업 아이템을 지금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그녀의 인생이란 롤로코스터가 높게 날다가 큰 폭으로 추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높이 올라가면 떨어지는 폭도 크기 마련. 최종 목표를 찾기 위해 여러 사업을 해보던 중, 28세의 나이에 그녀의 인생이 다시 밑바닥으로 내려오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가 평소 친하게 지내며 믿고 지낸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 잠깐의 선택과 믿음이 5년 동안 모았던 돈 모두를 날렸고, 그녀는 빚까지 떠 앉게 됐다.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20대 청춘을 바쳐 모은 금쪽 같은 돈을 한순간에 날렸다. 장 대표는 “그때 술을 안 먹는 날이 없었다, 6개월을 술만 먹고 집에서 매일 울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 밑바닥에 섰다. 어쩌면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빚과 절망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일 술만 먹고 폐인에 가까웠던 그녀를 구원해준 것은 20세 때 가졌던 사업가로서의 성공이란 꿈이었다. 그녀는 다시 돈을 모으기 위해 목욕탕 경리 일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야간 경리 일을 도맡아하며, 7급 공무원을 준비한 끝에 당당히 노동부 공무원이 된다.

그러나 안정적인 삶, 철밥통으로 불리는 공무원 생활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주위에서 하는 “여자는 공무원이 최고”라는 소리를 귀에 달고 다녔지만, 그녀는 기어코 공무원을 1년 반만에 그만둔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사업가의 길을 선택한다. 자신의 꿈을 향해 끝을 알 수 없는 롤로코스터를 또 다시 탑승한 것이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장 대표가 청년창업발전소를 차리게 된 계기도 이러한 롤로코스터의 인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사업 노하우와 창업의 실무를 알려주기 위해 지금의 청년창업발전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장 대표는 “이것이 나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내 꿈을 위해 나는 더 많은 사업을 해볼 것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년 창업 발전소 대표, 홈피트 코리아’의 수출 담당 부대표, 아트 매니저라는 장 대표의 범상치 않은 직함들은 이렇게 그녀의 인생역정을 들어야 비로소 이해가 간다. 장 대표는 또 다른 사업 거리를 모색하러 가는 듯 인터뷰가 끝나자 마자 소지품을 챙겨들고 사무실 문을 바쁘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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