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 벽면 문어 그림에서부터 압도당하다
상태바
전시관 벽면 문어 그림에서부터 압도당하다
  • 취재기자 이민재
  • 승인 2014.11.10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시아 최고의 미술 축제 제10회 광주 비엔날레를 다녀와서

한 5층 높이의 흰 벽면에 거대한 문어가 그려져 있다. 아니, 콘크리트 벽면을 부수며 뛰쳐 나오고 있는 듯하다. 세부의 터치까지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입체감과 생동감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 살아있는 문어(사진: 취재기자 이민재)

지난달 25일 광주 비엔날레를 관람했다. 전용관 앞에 도착하자 마자 이 ‘살아있는 문어’ 그림 앞에서 마치 물먹은 소금기둥 마냥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몇 분간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SF 영화에서 입체 영상으로 ‘몬스터의 습격’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관람객들도 마찬가지 였다. 모두들 전용관 벽면 앞에 서서 한동안 숨죽이며 문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역시 이번 비엔날라의 전시작 중 하나. 해설서엔 영국 작가 제레미 델러의 ‘무제 2014’라는 설명이 붙었다. 미술 문외한인 나에겐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유럽 미술계에선 상당히 이름이 높은 화가라고 한다. 초입에서 받은 이 충격은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여진을 남기고 있었다.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광주 비엔날레는 지난 9월 20일부터 11월 9일까지 광주 북구 용봉동에 위치한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에서 개최됐다. 광주 비엔날레는 아시아 최초의 비엔날레로 싱가폴과 상하이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에서 주목하는 예술 축제 중 하나다.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비엔날레는 38개국에서 105명의 작가를 초대했고, 주제에 부합되는 35가지 신작품을 선보였다.

광주 비엔날레는 도슨트(미술작품 가이드)가 나서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대한 해석, 작가나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줘 이해를 돕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매 30분마다 11회 운영되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휴일이라 그런지 이날 전시관에는 상당히 많은 내‧외국인들로 붐볐다. 모두들 전시작들의 의미를 하나라도 더 알아보려는 듯 도슨트의 설명에 귀를 쫑긋 세웠고, 어떤 작품 앞에선 도슨트의 동선과 떨어져 한참 동안 서서 찬찬히 음미하는 관람객들도 눈에 띄었다.

전시장 내부는 영국 출신 작가, 엘 우티모 그리토(El Ultimo Gritto)의 도트 픽셀의 벽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벽지는 전시 전체에 일관성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본격적인 작품의 등장은 캐나다 출신 작가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의 ‘불타는 창문’에서부터 시작 됐다. 캄캄한 밤을 나타내는 듯 검은 화폭에 붉은 불빛의 창문 하나가 그려져 있는, 약 100호짜리 작품이었다. 이를 보면서 현대인의 고독과 적막을 음미하고 있는데 뒤켠에서 “창문 하나 그려놓고 이게 무슨 미술작품인가”하는 한 50대 남자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그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이런, 츠츠…”라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이게 현대 미술이야, 추상과 초현실주의… 미(美)를 구상으로 표현한 것만 예술은 아니지”라며 힐책했다. “아름다움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현대미술을 제대로 관람할 수 있다네” 그 역시 전문 미술평론가는 아닌듯 했지만 미술에 대한 상당한 견해는 갖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1관의 초입에 전시된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의 ‘불타는 창문'(사진: 취재기자 이민재)

1관에 전시된 작품들은 낙태, 고문, 실종, 수탈 등의 폭력과 파격으로 가득했다. 이곳이 민주화의 도시 광주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모든 작품들이 잔인하고 보기 거북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슬기 작가의 '이불 프로젝트 U(Blanket project U)'는 ‘새 발의 피’, ‘땅 짚고 헤엄치기’ 등의 한국의 속담을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형해 이불에 자수로 담아냈다. 도슨트는 작품 속 이미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 이미지가 무슨 속담일까요” 묻고선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정답을 맞히신 분은 지금까지 한 분밖에 없었다”며 환하게 웃기도 했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는 회화나 설치미술뿐 아니라 일종의 행위예술도 벌어졌다. 스위스 출신 작가, 우르스 피셔(Urs Fischer)의 ‘38 E. 1st St.'는 일종의 퍼포먼스와 결합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자신의 뉴욕 아파트를 1:1 크기로 비엔날레 전시관에 옮겨둔 이 작품은, 관람객이 입구를 들어서려 할 때 입구 앞에 서있던 젊은 남성이 “안녕하십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는 물음을 던진다. 관람객이 이름을 말하고 전시작 속으로 들어갈 때 젊은 남성은 관람객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이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네임 아나운서’라는 작품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한 젊은 여성 관람객이 “엄마야!”라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동행한 관람객들이 일순 왁자지껄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는 이 같은 전시의 내용 이외에도 홍성담 작가의 작품 ‘세월오월‘을 통해 한차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이는 작품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고 박정희 대통령을 닮은 군복 차림의 인물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팔을 잡힌 채로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해당 작품이 사회적 이슈에 오르자 광주시 행정부는 ‘세월 오월’의 정치 편향적 성격이 전시 취지와 어긋난다고 밝히며 수정을 강요해, 결국 해당 작품의 전시는 취소됐다.

올해로 20돌을 맞는 뿌리 깊은 광주 비엔날레의 역사에 사전검열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오점이 남았다. 비록 전시장에서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의 실물을 보진 못했지만, 그것에 얽힌 이야기가 적힌 현수막은 여전히 작품이 있던 위치에 걸려있었다. 또 윤장현 광주 시장이 지금까지 광주 비엔날레를 세계적 입지의 축제로 끌어올린 공헌자들을 내치고 광주비엔날레와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광주시립미술관장까지 자신의 사람을 들어 앉혔다는 추문이 전시관 주변에 나돌기도 했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흥행은 역대 최악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시 개시 25일째인 10월15일 기준으로 관람객은 4년 전 18회 비엔날레에 비해 60%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광주 비엔날레 측은 혁신위원회를 발족해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고 있다. 과연 2년 후에 다시 찾아올 제 21회 광주 비엔날레는 올해의 문제들을 딛고서 다시 비상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