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내, 일곱 살 딸, 네팔 공동체...이게 나의 전재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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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내, 일곱 살 딸, 네팔 공동체...이게 나의 전재산이죠"
  • 취재기자 이선주
  • 승인 2018.06.0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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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출신 마단라지 기리 씨의 부산 살이..."2002부산 아시안게임 선수로 부산 와 정착, 네팔 공동체서 가수 생활" / 이선주 기자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부산의 해운대,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지하 인도 음식점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네팔에서 온 마단라지 기리(42) 씨. 한국에서는 그를 마단기리 씨라고 부른다. 한국에 온 지 벌써 15년이 된 마단기리 씨는 두 손을 모아 불교식으로 인사했다.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빠져드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인도식당에서 만난 마단기리 씨(사진: 취재기자 이선주).

◇"제 이름은 마단기리입니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하던 그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네팔 국가대표 육상선수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처음에 왔을 땐 그저 최선을 다하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에게 반해 부산에 곧바로 정착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안 게임 후 다시 네팔로 돌아갔다가 2003년에 한국에 정착했다. 다시 한국에 오자마자, 그는 김해에서 선박 부품 공장에서 일을 했다. 힘들었던 그때, 그에게 유일한 행복은 다른 외국인들 모임에 나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네팔 공동체가 없어서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사람들과 어울려 많은 행사를 했다. 그후 그는 서울의 네팔 공동체인 NCC의 부산경남 모임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는 “부산경남 네팔공동체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는 게 지금 내가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부산경남 네팔공동체 행사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마단기리 씨(사진: 영상기자 서지현).

◇ "네팔 노래 들어보셨나요?"

그는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그는 네팔의 국민가수 어니 쵸잉 돌마(Ani Choying Drolma)’가 부른 <풀꼬 아카마(PhoolKo Aankhama)>라는 노래를 진심을 담아 불렀다. 이 노래 제목은 ‘꽃의 눈으로 보면’이라는 뜻이란다. 가사도 "꽃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꽃으로 나타납니다"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딸이 이제 일곱 살이 되어간다. 많은 것을 보고 자랄 시기인데 세상을 아름답게 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딸에게 자주 불러준다”고 말했다. 네팔 공동체에서 행사를 자주 하는데 그 때마다 참석해 노래를 부른다. “네팔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네팔노래를 듣기가 쉽지 않다. 모든 고향 사람들이 모여 있고 나는 노래로 흥을 돋울 뿐이다”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내가 더 기분이 좋다”고 계속 노래하는 이유를 말했다.

◇ 제2의 고향, 부산

그도 처음부터 부산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말도 못하고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했다. 그의 네팔 친구들 중에는 일을 포기하고 네팔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는 고생했던 옛 시절이 생각나서 최근 한국으로 들어오는 네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준다. 그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그는 “지금은 한국어를 잘 할 수 있고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부산이 제2의 고향같은 느낌이 든다”고 웃었다.

그는 진짜 고향인 네팔이 항상 그립다. 네팔은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한국은 네팔보다 잘 사는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그는 늘 생각한다. 네팔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가 뭘까? 그는 “사실 네팔은 내일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잘 하지 않는다. 그게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이지 않을까싶다. 한국 젊은 친구들을 보면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수줍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도 아내를 많이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시안게임에서 그의 한국인 아내는 통역하러 왔고, 그는 선수로 참여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2003년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고 우연히 교회에서 다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2004년부터 만남을 이어왔고 2009년에 결혼했다. 동갑내기 부부다. 그는 "외국인 이주민이라 반대가 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처가 어른들께서 나를 보자마자 결혼을 허락하셨다. 이유는 아직 모른다”고 웃었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 배경사진을 보여줬다. 마단기리 씨를 닮은 예쁜 딸이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됐다.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간다. 아내와 나를 반반 닮아 사랑스럽다”며 '딸바보' 모습을 보여줬다. 

◇ 나의 미래, 그리고 꿈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부끄럽지 않은 가족을 만드는 거다. 그는 "외국인 이주민과 결혼을 했다고 아내 주변 사람들은 말이 많다. 문화도 다르고 힘들 거라고 얘기한다. 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가족들에게 좋은 아빠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 꿈은 딸의 공부다. 그는 대학 가기 전에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다. 그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운동 때문에 공부를 중단해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딸이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지인의 도움으로 음식점을 맡아 운영하게 됐다. 평일 아침에는 가게를 운영하고 네팔 공동체에서 노래하는 봉사를 한다. 그는 그의 노래가 네팔 사람들의 흥을 돋울 수 있고 힘이 된다면 오래 노래하고 싶다. 그는 "9월이면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네팔의 다샤인이라는 명절이 있다. 이때 행사를 하는데 얼른 노래하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

네팔에서 온 외국인이라 무시당했던 힘든 과거를 잊고 즐겁게 노래하며 살아가는 마단기리 씨. 그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네팔에서 오는 고향 친구들이 모두 행복하면 좋겠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낯선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네팔인들을 위해 그는 오늘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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