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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폐지하라”는 현직 교사의 절규...너무 무거운 스승의 무게/ 편집위원 이처문
편집위원 이처문

산동네 공부방 아이들에게 기타 반주를 가르친 지 3개월이 됐다. 물론 가르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매주 한 번씩만 봉사해달라는 공부방 수녀님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다. 기본적인 코드 잡는 법과 몇 가지 주법을 익힌 초보 기타리스트이지만 초등 5, 6학년생 제자들은 깎듯이 ‘선생님’이라 부른다.

지난 주 연습곡은 우리에게 익숙한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사랑 노래 <연가>였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잔잔해져 오면~/오늘 그대 오시려나~/저 바다 건너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마오리족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는 노래다. 20년 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를 여행했을 때, 마오리족 중창단이 어느 무대에서 들려주었던 환상적 화음이 귓전에 맴돌았다. 아이들에게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재미있어 했다.

가르침에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아이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듣는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스승’을 뜻하는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mentor)에서 유래했다. 멘토르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해 2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보며 가르쳤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은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 또는 ‘스승’의 뜻을 지니게 됐다. 인도에서 선생님을 통칭하는 ‘구루’나, 유대교에서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의 ‘랍비’도 스승에 해당한다.

텔레마코스와 멘토르(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프랑스 철학자 조제프 자코토는 1818년 네덜란드의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쳤다. 당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다. 그는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이용해 프랑스어를 익히게 했다.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철자법이나 동사변화 등 기본조차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단어와 그 단어들의 어미변화 이치까지 스스로 찾아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견해를 프랑스어로 막힘없이 써냈다. 자코토는 깨달았다. 가르침이란 단순히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앵무새처럼 되풀이시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조제프 자코토(사진: Creative Commons)

예전에 스승의 역할은 ‘설명하는 일’이었다.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스승의 수준만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코토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 이런 논리를 뒤집었다. 그는 설명의 원리를 ‘바보 만들기’ 원리에 불과하다고 했다. 설명은 교육자의 행위가 아니라 교육학이 만든 신화이자,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으로 분할돼 있는 세계가 만든 우화라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무지한 스승’이라 불렀다. 제자가 스스로 뭔가를 터득하도록 원인 제공을 하는 역설적 의미의 스승이다.

최근 전북의 한 초등학교 현직교사가 ‘스승의 날을 폐지해달라’는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려 ‘스승’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스승과 교사는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전문적인 양성기관을 거쳐 자격증을 받은 교사를 스승이라 칭하고, 기념일까지 만들어 그 부담을 교사들에게 떠안기는 건 잘못이라고 했다. 스승의 날에 ‘일절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야 하고, 카네이션 선물도 학생 대표에게서만 받아야 하고,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포상을 놓고 교사들이 눈치를 보는 등 온갖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게 ‘스승의 날’이란다. 그래서 스승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교사로 당당하게 살고 싶단다.

스승의 날 포스터(사진: Sukanta Pal)

나의 초등학교 4학년때 담임 선생님은 어려운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스승이었다. 편모 가정의 아이들에겐 방과 후 빵을 사서 들려 보냈다. 미술 시간을 괴로워하던 학생에겐 크레파스를 몰래 사주었다. 급식빵이 남으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남몰래 싸주었다. 남을 업신여기는 아이들은 따끔하게 혼을 냈고, 풀이 죽은 아이들에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았다.

‘스승’으로 살아가야 하는 교사들의 불편한 진실을 더는 외면하면 안 될 것 같다. 교사에게 스승의 덕목을 강요하며 옥죄는 일은 과거 국가중심주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스승의 날만큼은 교사들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죽하면 스승의 짐을 내려놓으려 하겠는가.

편집위원 이처문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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