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남자, 장국영을 그리며 / 배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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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남자, 장국영을 그리며 / 배상윤
  • 부산시 동래구 배상윤
  • 승인 2018.05.1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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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情所困無心戀愛世(감정소곤무심연애세).”

장국영의 유서에 적혀있던 말이다. 해석하자면 ‘마음이 피로해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때문에 4월엔 꼭 장국영이 나온 영화 한 편을 보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올해 4월에 나는 그가 출연한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의 작품을 꼽아 그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 봤다.

첫 번째는 1990년에 개봉한 <아비정전>이다. 이 영화는 장국영이 트렁크와 런닝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장면이 가장 유명하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장국영이란 배우를 알게 됐는데, 사실 영화를 여러 번 봤음에도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 특유의 연출과 장국영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장국영은 ‘아비’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연이 많고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마담 출신의 여성에게 입양된 그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가족에 대한 결핍 때문일까. 그는 매사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성이 많음에도 그는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고 쉽게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아비정전>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말은 아비가 자신의 삶을 묘사하며 한 말이다. 실제로 아비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토록 찾던 친어머니와의 만남이 어긋나자 그제야 죽음을 맞이하고 쓸쓸히 부유하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훗날 장국영은 아비가 본인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장국영의 삶이 발 없는 새와 닮아 보이는 건. 가수로 데뷔해 잠깐의 무명기를 거친 그는 금세 대중의 관심 속에서 날개짓을 했다. 연예계 생활에 싫증이 나 캐나다로 떠났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스크린에 화려하게 돌아왔다. 결국 그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것도 대중의 사랑과 카메라 앞이었다. 장국영은 죽고 나서야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죽을 때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 발 없는 새 그 자체인 것 같다.

<아비정전>을 찍고 나서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장국영은 1993년에 <패왕별희>에 출연한다. <패왕별희>는 경극을 하는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장국영은 ‘데이’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데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미모를 타고나 남자라는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여성의 역할을 강요당한다. 성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던 그는 자신과 함께 무대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친구, ‘샬로’에 대한 사랑으로 혹독한 훈련을 견딘다. 결국 극에서 ‘우희’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최고의 경극배우로 자리 잡게 된다.

여기서 데이는 굉장히 나르시스트적인 인물이다. 우희 역을 위해 살아온 삶이어서 그런지 그는 무대 밖에서도 여성스런 몸가짐과 말투로 생활했고, 여성의 모습으로 분장을 한 자신의 모습에 애착도 강했다. 장국영은 이런 중성적인 인물임에도 조금의 위화감 없이 훌륭하게 데이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장국영은 연예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는 남녀의 두 성별을 한 사람이 동시에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장국영이 데이가 되고, 데이가 우희가 되어 춤을 추는 모습은 우희의 상대역인 ‘패왕’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해 보인다. 경극의 인기가 시들어가자 데이는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아편에 중독되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도 청초함이 엿보인 그의 모습을 보면 이미 높은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장국영은 한 인터뷰에서 무대를 향한 데이의 강한 열망이 자신의 모습과도 닮아있다고 했다. 하지만 무대 밖의 데이는 한없이 공허하고 또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자신은 데이를 연기하고 싶지만, 그 자체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서. 그렇게 말한 그는 정말 더 행복했을까. 장국영의 삶의 끝자락에서 슬픔에 젖어있는 데이의 모습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

2013년 4월 홍콩 중앙 도서관의 red mission에 전시된 장국영이 <패왕별희> 촬영 당시 입었던 옷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마지막으로 1998년에 개봉한 <해피투게더>다.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동성 간의 사랑을 다룬 점도 특별하게 다가오지만 나는 장국영이 맡은 ‘보영’이라는 캐릭터에 더 관심이 갔다. <아비정전>과 같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라 그런지 보영과 아비의 모습은 많이 닮아 있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 불안함 속에서 나오는 매력이 사람을 이끈다.

극중에서 보영의 캐릭터는 <아비정전>의 아비보다 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아비는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아픔이 그의 이기심을 대변해줬지만 보영은 그런 배경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가끔은 너무 이기적이고 못되게 구는 보영이 밉게 보일 때도 있다.

보영이 손을 심하게 다쳐 한동안 아휘가 돌봐주는 장면이 있다. 방랑벽이 심한 보영이 부상 때문에 나가지 못하자, 아휘는 내심 안도한다. 하지만 보영의 부상이 나아가자, 그는 담배를 사러간다는 핑계로 외출을 하는데, 아휘는 보영의 외출을 막기 위해 담배를 몇 보루씩 사다 놓는다. 보영은 아휘의 행동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사온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침대에 눕는다. 이때 보영은 대사하나 없지만 그가 느끼는 권태와 짜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순하디 순한 장국영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보영의 이기적인 모습에 화가 날 때쯤 결국 아휘는 보영을 못 견디고 떠난다. 보영은 처음에 다른 남자들을 만나며 방탕한 삶을 살지만 곧 아휘를 잃은 상실감에 빠진다. 보영이 아휘와 함께 지냈던 방에서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담요에 몸을 묻고 슬피 우는 장면을 보면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보다 그저 보듬어주고 싶고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장국영이 왕가위와 작업한 작품은 세 작품뿐이지만 그 중 두 작품에서 장국영은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왕가위가 장국영 내면에 있는 슬픔을 알아채서 그 역할을 맡긴 건지, 장국영이 아비와 보영을 연기하면서 눈빛에 우울함이 감돈 건지는 잘 모르겠다.

세 작품을 보고 난 장국영에 대한 내 감상은 ‘아름답다’다. 명색이 인기 배우답게 얼굴 이목구비 자체의 수려함도 지녔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의 눈빛이었다. 큰 눈에 짙은 쌍꺼풀이 그의 눈을 한없이 순해보이게 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상냥함과 친절함이 묻어나는 그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처음엔 자살로 얼룩진 그의 마지막 모습 때문인지 사진 속 장국영의 모습을 보면 우울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몇 그의 일화를 접하다 보니 단단한 내면을 가진 강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힘’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가는 재주가 있었는데, 동료 배우인 장만옥과의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장만옥은 장국영의 친한 친구이자 함께 80, 90년대 홍콩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배우다. 고지삼 감독이 연출을 맡은 <가유희사>에도 장국영과 장만옥은 함께 출연했는데, 감독에 의하면 장만옥은 촬영장에서 꽤 거만한 태도를 보여 종종 촬영에 차질을 빚었다고 했다. 한번은 장만옥의 억지에 곤란해 할 때 장국영이 나타나 "만위(장만옥의 중국 이름), 그러면 못써"라고 말해 다시 촬영은 순조롭게 재개됐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천안문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한 중국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동료 배우인 종초홍이 투자사 사장에게 불합리한 요구를 받자 장국영이 직접 나서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했던 그의 강단 있는 모습이 많은 팬과 동료 배우들에게 더 깊은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건 아닐까.

“아름다울 때 떠나고 싶다. 사람들이 우주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그 끝을 보지 않아서다.”

장국영이 은퇴 고별 콘서트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단지 자신의 은퇴에 대한 이야기였겠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새삼 그 말의 뜻이 다르게 다가왔다. 49세,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는 정말 그가 아름다울 때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에 대해 안 건 불과 2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의 사진을 보면 먹먹한 마음이 앞선다. 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떠났다는 장국영. 그리고 그가 맡았던 아비와 데이, 보영도 이제는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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