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갑질에 초소형녹음기 사들이는 직장인들, "까라면 까는 시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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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갑질에 초소형녹음기 사들이는 직장인들, "까라면 까는 시대 지났다"
  • 취재기자 조윤화
  • 승인 2018.04.2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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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펜, USB, 키 홀더 등 출시....일부 회사는 "기밀 노출·불신풍토 조장" 녹음 금지해 또 다른 갈등 요인 / 조윤화 기자
직장 내 갑질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직장인들이 녹음기를 지니고 다니는 것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스마트폰으로 녹음 기능을 사용하는 장면(사진: 취재기자 조윤화).

최근 직장 내 갑질이 사회문제화되면서 일부 직장인들이 상사의 갑질에 대응하기 위해 초소형 녹음기를 지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를 두고, 회사는 업무기밀 유출과 직장 내 불신 조장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해 자칫 새로운 '노사 갈등'의 빌미가 될 우려도 나온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논란이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히는 ‘갑질’을 다시금 뜨거운 화두로 올려놓았다. 광고 대행사 직원의 휴대폰에 녹음된 조 전무로 추정되는 여성의 음성이 담긴 음성 파일은 논란에 불을 지피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상사의 말에 토 달지 않는다”,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속된 말로 ‘까라면 깐다’는 마음가짐으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요즘 보기 드물어졌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 저녁 없는 삶을 살았던 이들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외치며 자신의 삶을 돌보기 시작한 것. 특히 직장 내 갑질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직장인들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니라며, 시중에 나와 있는 ‘갑질 매뉴얼’을 익히는 등 대응에 나섰다. 일부 직장인은 아예 '회사용 녹음기'를 따로 구매하기도 한다.

주로 배우자 외도 증거 수집용으로 암암리에 사용되던 초소형 녹음기를 ‘갑질 증거수집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녹음기는 볼펜, USB, 키 홀더 등 다양한 사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아 겉으로 보기에 녹음기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직장인들이 특히 선호하는 것은 볼펜 형태의 녹음기. 1년 차 직장인 김모(24, 부산시 남구) 씨는 최근 볼펜 형태의 녹음기를 구매했다. 그는 “휴대폰에 있는 녹음기 기능을 사용하면 쉽게 눈에 띌 뿐 아니라 사용하기도 불편해서 최근에 볼펜 형태의 녹음기를 하나 장만했다”고 말했다. 그는 “업무 중에 일어나는 상사의 말 바꾸기, 책임 떠넘기기 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끼리 이간질 문제로 시달린 끝에 녹음기를 샀다”며 “꼭 녹음하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다는 자체로 든든한 마음이 생긴다”고 털어놨다.

볼펜형 녹음기 구매에 만족을 나타내는 상품 후기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사진: 쿠팡 화면 캡처).

볼펜 형태의 녹음기 상품 후기에는 “직장 상사 보내려고 샀다. 녹음한 거 들어보니까 잘 되고 마음에 든다”, “돈 없고 빽 없는 세상, 증거만이 살길이다. 하나씩 사라”, “회사에서 쓸려고 구매했다. 가성비가 매우 훌륭하다” 등 구매에 만족을 나타내는 반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직장 내 갑질 문제가 만연하다는 얘기를 방증하는 것. ‘직장에서 겪는 갑질과 불공정한 업계의 관행을 바꾸겠다’는 목적으로 여러 법률가와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민간단체 ‘직장 갑질 119’는 지난해 11월 직장인 700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갑질 경험’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결과, 직장인 10명 중 7명이 넘는 75.8%의 응답자가 ‘직장 갑질을 경험해봤다’고 답했다. 직장 갑질 119 측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직장 내에 상식과 기본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직장 갑질 119는 이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갑질 대응 매뉴얼'을 공개했다. ▲갑질 관련 내용 그때 그때 적기 ▲녹음 또는 녹취하기 ▲통장, 월급명세서, 임금내역, 영수증 등 증거 모아두기 ▲직장 안에서 목격자, 동료 발언을 모아두고 가족이나 지인에게 말해두기 ▲CCTV 위치 알아두기 등이 대응법이다.

반면, 업무기밀 유출과 직장 불신을 조장한다는 우려 때문에 원칙적으로 사내 녹음을 금지하는 회사도 있다. 비즈한국에 따르면, 전자상거래업체 쿠팡은 내부규정으로 업무 관련 대화 녹음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불가피하게 녹음해야 할 경우 쿠팡 리더십팀 혹은 법무팀에 반드시 사전 서면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4월경 배송 직원과 회사 측의 노사갈등이 한창 논란이 되던 중에 신설된 해당 조항을 두고 일각에선 “녹취 파일이 폭로되면, 회사 이미지가 하락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상대방 몰래 대화 내용을 녹음한 몇 직장인들 사이에서 혹여나 자신들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진 않을까 우려도 나온다. 현행 통신비밀 보호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청취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제3자가 아닌, 녹음하는 장본인이 대화에 참여한 당사자일 경우 녹취가 불법이 아니다.

또한, 재판에서 녹음파일이 주요 증거로 쓰기 위해선 ’무결성‘ 보장이 관건이다. 대법원은 '선고 2011도6035' 판결문에서 ”녹음테이프는 성질상 작성자나 진술자의 서명이나 날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녹음자의 의도나 특정한 기술에 의하여 내용이 편집·조작될 위험이 있다“며 ”대화 내용을 녹음한 원본이거나 혹은 원본으로부터 복사한 사본일 경우에는 복사과정에서 편집되는 등의 인위적 개작 없이 원본의 내용 그대로 복사된 사본임이 증명돼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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