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우암동엔 일제의 수탈용 '소 축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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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우암동엔 일제의 수탈용 '소 축사' 있었다
  • 취재기자 정혜리
  • 승인 2014.09.1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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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역사 사진전...피란민 고단한 삶 담은 '적기 수용소'도

▲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 앞에는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부산시 임시수도기념관(관장 성현주)은 20세기 부산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부산시 남구 우암동과 그 주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우암동 사람들> 사진전을 9월 2일부터 11월 16일까지 갖는다.

우암동은 부산항 끝머리인 7부두와 8부두 뒤편에 위치한 지역이다. 우암동은 지금까지도 부산의 낙후 지역 중 하나로 정작 부산 사람들 중에서도 우암동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의 세월이었던 20세기 역사 속에서 우암동 공간은 어느 곳보다 선명한 변화의 발자취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암동에는 조선 소 수탈 현장이었던 동물 검역소와 소 막사가 있었다. 그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암동 소 막사는 귀환 동포와 피란민들의 수용소로 변했고, 1960년대 이후 공업화 과정 속에서 우암동 전역은 일을 찾아 도시로 올라 온 서민들의 주거공간이 됐다.

이번 사진전은 20세기 역사 속에 나타난 이런 우암동의 변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런 역사 속에 나타난 우암동 주민들의 다양한 삶의 풍경들을 담은 사진들로 꾸며졌다. 전시회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들은 우암동 주민들의 앨범 속에 간직돼 있던 개인 사진을 모은 것도 있고, 1959년 동항성당에 부임해 온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주민들의 삶을 찍은 사진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130여 점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 관계자는 “부산 근현대 역사 과정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우암동을 찍은 사진 전시를 통해 지역 사회에 대한 인식의 장을 넓혀보고자 특별전을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암동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크게 5개 부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들은 ▲소 바위 마을과 표민들의 집합처, ▲사라진 소 바위와 아까사끼(적기, 赤崎) 우암동, ▲남겨진 소 막사와 피란민 마을의 형성,  ▲산동네, 달동네 우암동,  ▲우암동의 오늘 등이다. 

▲ 우암동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소 바위 마을을 보여주는 사진(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조선시대 우암동은 바다 포구 안에 소 같이 생긴 바위(우암)가 부산항을 굽어보고 있는 한적한 풍광을 지닌 마을이라고 해서 우암동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은 동래부 관할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 연안에 표류하던 일본 어민들이 송환에 앞서 임시로 수용되던 ‘표민수수소(漂民授受所)’가 설치돼 있었다. 이번 사진 전시전에서는 초량왜관 시절 부산항의 전경을 담고 있는 ‘조선부산포초량화관도’와, 2014년 부산항의 현재를 담은 사진이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이 두 장의 사진으로부터, 우리는 일제강점기 이전 부산항의 원형과 근현대 시기의 급격한 변화를 지나온 오늘의 부산항 모습을 보며, 시간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변회의 힘을 실감할 수 있다.  

▲ 사라진 소바위에 관련된 우암동 사진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일제강점기 때, 우암동 앞 바다인 적기만에 ‘적기만 매축사업(1934~1944)’이 진행돼 우암동 앞바다가 매립됐고, 조선 소 수탈을 위한 수출우 검역소와 소 막사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바다 매축 과정에서 우암포에 있던 소 모양의 소 바위가 사라졌고, 그 뒤부터 우암동이라는 고유의 이름보다는 우암동 앞 바다의 원래 이름인 적기만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아까사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09년 수출우 검역소가 있던 당시 우암동의 풍광과 검역을 마친 건장한 소들이 범선에 실려 나가는 사진도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근대사료연구가인 FP홀딩스의 김태영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희귀 엽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는데, 이 엽서는 1909년 수출우 검역소 개소 당시 적기만에서 수출우가 선적되는 광경을 담고 있다. 이 엽서는 대한제국 마지막 해인 1909년 수출우 검역소(농림축산 검역본부 전신)에서 발행한 것으로, 엽서의 오른쪽 상단 소의 머리 도안에 검역소 개소일인 융희 3년(1909년) 10월 17일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엔 대한제국 상징무늬인 이화(李花, 배꽃)가 표현돼 있다.

▲ 소 막사 일부 유적의 사진과 피란민 마을 사진(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은 피란처이자 임시수도였다. 정부는 임시조치법을 발효시켜 부산 시내 곳곳에 마련된 40여 개 수용소와 공공건물에 전국각지에서 몰려오는 피란민을 수용했다. 우암동의 소 막사는 가장 많은 수용능력을 지닌 피란민 구호시설로 분류됐으며, 앞 바다 적기만에서 이름을 따서 ‘적기 수용소’로 불리게 됐다. 이때 적기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북 피란민들이었다. 소 막사 일대에 자리 잡은 피란민들은 막사 내부에 통로를 만들고 가마니, 이불 등으로 공간을 구분해 함께 살아갔다. 이들은 도로, 수도, 변소 등 기본적인 주거환경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물자부족, 질병, 화재 등으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만 했다. 사진전에서는 당시 우암동 매축지 위 미군부대로부터 얻은 음식 찌꺼기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피란민들의 모습들도 전시되고 있다. 

▲ 산동네, 달동네 우암동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한국전쟁 이후 우암동에는 다양한 공업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산항의 수출입 물류유통이 확대되면서 우암동의 매축지 일대는 물류의 보관, 저장, 운송 작업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급속하게 변해갔다. 그래서 우암동은 다양한 일자리가 넘쳐나는 곳이었으며,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정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구릉으로 이뤄진 경사지 위 빈 공간에는 어김없이 이주민들의 판잣집이 들어찼으며, 이들로 산동네와 달동네가 형성돼 갔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공장지대 우암동의 활기와 함께 생기 넘치는 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도 역시 전시된다. 

▲ 우암동의 오늘을 보여주는 사진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현재 우암동은 지역 내에 산재해 있던 공장들이 줄어들고 2000년대 이후 재개발하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의 순간에 서있다. 공장이 떠나간 자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오래된 주거지와 대별되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점을 보여주는 빈집 사이 골목, 다정한 주민들의 표정, 그리고 주거지 풍경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우암동 사람들 전시회를 찾은 대학생 길정희(23,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씨는 “어릴 살았던 동네라 관심이 많았다. 전시를 보고 우암동 지명에 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우암동 주민, 동항성당의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 FP홀딩스 김태영 대표, 우암동에 소재해 있던 공장 관계자들, 부산시 남구청,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곳의 도움을 받아 열리게 됐다.

관람시간은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자세한 문의는 임시수도기념관 사무실(☎051-231-6341)로 연락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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