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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은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희생자 신원(伸寃) 사업 서두르길/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신문사 현직 기자 시절 특별하게 기억이 남는 제주 출신 후배가 한 명 있었다. 오현 고등학교와 서울 사대를 졸업, 정치부 사회부 등 주요 부서에서 맹활약한 민완기자였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그 친구를 포함한 시골 출신 후배 몇 명과 함께 회사 부근 선술집에서 소주 한 잔 걸치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화제가 각자 자신들의 고향 얘기로 옮아갔다. 이 때 한 친구의 제의로 누구 고향이 더 시골구석이었나, 누가 더 ‘촌틱’한가를 경쟁하는 내기가 붙었다.

다들 초등학교 때까지 전화나 TV를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기본이었다. 일부는 자신이 살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밑에서 중학교 입시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또 경북 봉화 깡촌 출신 한 친구는 자기 동네 마을 어르신들은 사시사철 치마저고리와 합바지만 입고 다니셨다면서 자신의 뇌리 속 고향 풍경은 19세기 말 서양 사람들이 찍었던 조선의 농촌 모습 바로 그대로였다고 의기양양했다. 이에 지리산 인근 전라도 벽촌에서 올라온 한 친구는 코웃음치며 “그거야 우리 고향도 마찬가지제”라면서 “우리 할배는 맨날 갓쓰고 곰방대 물고 다녔으라이”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현고 출신 그 친구의 추억담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있던 집에서 제주 시내에 있는 중학교 다닐 때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로 통학했는데 차비 조로 차표나, 돈이 아니라 계란 한 알씩 차장에게 건네 줬다 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표정과 계란을 건네주는 듯 취한 제스처가 너무 우스꽝스러워 다들 웃음보를 터뜨렸다.

또 계란이 없어 한동안 차비 외상이 한참 밀렸을 때는 명절날 암탉 한 마리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암탉이 버스 안에서 푸다닥거리며 도망치기 일쑤였고 승객들이 이 닭을 붙잡으려 뛰어다니느라 몇십 분씩 난리 북새통을 피우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소개됐다. 이 장면에서 모두 포복절도 했다. 정말 아련한 60년대 대한민국의 시골 풍경이었다. 현재 세련된 국제관광지로 세계적 명성을 날리는 제주도에 불과 몇십 년 전 그런 촌스러움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 100%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들의 술자리 ‘촌틱 자랑대회’에서 영예의 금상은 그가 차지했고 여기에 모두 동의했다.

그 자칭 ‘제주도 촌놈’ 친구가 보너스로 한마디 소개했던 시골스러움의 일화 한토막이 있었다. 자기 할머니는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바다 구경을 못해봤다는 것이었다. “으잉, 그럴 리가!” 요즘 자동차로 30분이면 종단, 횡단 다 할 수 있고 한두 시간이면 해변 일주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제주도에 그리 깊은 산골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다들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이라고 했다. 그의 할머니는 그 당시 바다쪽으로 가면 횡액을 당한다는 두려움으로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 부근에서 농사를 지으며 70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지난 4월 3일 4.3 사건 70주년을 계기로 여러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여러 가지 관련 기사와 다큐 영상물을 보고 그 친구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 할머니가 바다를 경원시한 것은 분명 4.3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KBS에서는 스타 국사 교사 설민석 씨가 ‘우리가 몰랐던 제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4.3 관련 역사 특강을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중산간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람은 보는 즉시 박살내고 진압하고 처형하는 ‘3진 작전’을 폈다고 한다. 당시 30만 제주도민의 1할인 3만여 명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애꿎게 살륙당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세 살짜리 어린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광기에 찬 살륙자들은 그 아이를 바위에 내동댕이 쳐 죽였다고 설민석은 전했다. 그는 이 얘기를 하는 도중 자신도 지금 세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면서 “왜 그렇게 죽여야 했을까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청중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제주도 함덕해수욕장(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중산간에 있는 양민들 뿐 아니었다고 한다. 바닷가쪽 사람들도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받은 뒤 죽임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어떤 곳에서는 한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을 모아놓고 총질을 해댔다고 한다. 지금 관광지로 이름 높은 함덕 해수욕장, 정방폭포, 그리고 북촌마을 등이 그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북촌마을에선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주도 정방폭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많은 사가들이 자유당 정권과 미군, 그리고 친일파 잔당들의 양민학살로 보고 있지만 일부는 여전히 빨갱이 무장 폭동에 의해 촉발된 토벌작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극우 보수인사들은 4.3이 명백한 좌익분자들의 폭동이었다는 인식을 버리지 않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조차 당시 양민학살을 자행했던 서북청년단에 대해 ‘토벌대’란 용어를 동원했다. 일본 강점기에 만주 일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만주군 특무대 장교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군 요직을 거친 모 인사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자유한국당이 그들 친일세력의 맥을 잇고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촌틱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 오현고 출신 후배 뿐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4.3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제주도 출신은 아니지만 필자 역시 4.3을 소재로 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을 읽고 나서 한동안 나도 트라우마를 앓았다.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주 4.3 70주년 국민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사진: 더 팩트 임영무 기자, 더 팩트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제주도 평화공원에서 4.3 희생자 추념사를 통해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선언하고 “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70년 전 친일 반공세력의 광기에 애꿎게 목숨을 잃은 3만여 명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고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주도민들의 깊은 상처를 위무하기 위해 4.3 신원(伸寃) 사업은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다. 

논설주간 강성보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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