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놈 죽여서 파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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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놈 죽여서 파묻어!”
  • 대표 정태철
  • 승인 2014.08.24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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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7년 10월 4일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지금부터 36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집결지를 출발해서 논산훈련소에 도착했고, 그 입구 앞 대기막사라는 곳에서 여러 입대자들과 하는 일 없이 한 이틀 대기하게 됐다. 그런 어느 날 밤, 훈련소 관계자들이 들이 닥치더니, 도망가지 못하도록 대기병력 끼리 서로 팔짱을 끼게 하고 훈련소 안으로 이동시켜, 보이는 막사마다 30-40명씩 들여보냈다. 내가 들어간 막사로 조교들 네댓 명이 각자 몽둥이를 들고 들어왔다. “다들 침상에 정렬해!”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조교들은 훈련병들을 주먹과 발과 몽둥이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퍽,’ ‘윽’ 하는 소리가 났다. 나도 누군가의 군홧발에 가슴을 맞고 침상에 고꾸라졌다. 그때 들었던 단 한 마디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한 놈 죽여서 파묻어!”

당시 그 말은 내게 진짜로 들렸다. 그들은 몇 사람을 정말 죽일 것 같이 우리를 패고 또 팼다. 그 순간, '아  이곳이 지옥이구나!'라는 공포가 전신을 엄습해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고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이게 내가 군대 입대 첫날에 당한 수모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지옥 같은 상황은 아마도 입대 첫날 신병들의 사회 물을 신속하게 빼기 위한 조교들의 노련한 연출인 듯했다. 그러나 그게 당시 신병들에게는 결코 장난이 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훈련소 기간 중에는 차라리 편했다. 간부들이 보는 훈련 시간에 구타는 없었다. 그때도 군대 내 구타가 사회 문제였고, 소원 수리 제도도 있었다.

문제는 논산훈련소 퇴소 후 자대에 배치 받고서부터였다. 당시 내가 근무한 곳은 서울 시내 모처였다. 중대본부에서 대기하다, 동료 신병 2명과 나는 함께 소대 내무반으로 취침 직전에 들어갔다. 우리는 혹독한 전입신고를 각오했지만, 그날이 바로 홍수환 선수가 4전5기로 권투 세계챔피언이 된 전설적인 날이었다. 한 고참이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그냥 재우라고 했다. 그래도 그럴 수가 있냐며 누군가로부터 주먹으로 몇 대 배를 맞고 우리 3명은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훈련도 없고 근무도 없이 상병 한 사람이 이끄는 으슥한 곳으로 가서 날마다 특별 훈련을 받았다. 그것은 마구 두들겨 패거나, 선착순을 시키거나, 소위 ‘대가리 박기’나 ‘깍지 끼기’를 시키는 게 전부였다. 나는 운동신경이 있어서 남보다 잘 뛸 수 있었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육사를 갈까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이 잘하고 못하고는 거기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은 일종의 군기 잡는 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 악몽 같은 생활이 한 달 간 계속됐다. 어느 하루는 밤에 자려고 침상에 누웠는데, 우리는 그날 희한하게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아 드디어 오늘이 소대 와서 처음 안 맞고 자는 날이구나’ 하고 자려는 순간, 고참이 다가와 “오늘 너희들 한 대도 안 맞았지? 한 대씩만 맞고 자” 하면서 또 때렸다. 그 부대는 그런 부대였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불분명한 이유로 명치를 구타당한 끝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이 내 주위에 서 있었고, 그들은 내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내 눈에는 서러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당일 우리는 내 덕분에 간만에 모두 푹 쉬었다. 그 즈음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 나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고 씩씩하게, 고참들이 협박한 대로 거짓말을 했다. 나도 부모들에게 당시의 악몽을 손톱만큼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 안도하셨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시기에 내가 이렇게 맘놓고 당시의 진실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소대에서는 그 후 한 달 간격으로 내 바로 위 고참인 두 명의 병사가 탈영했다가 잡혀 영창에 갔다. 새로운 신병은 계속 들어 왔고, 그들도 나처럼 죽도록 맞았다. 그 중 한 명이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쳤고 어디론가 전출됐다. 가해자 고참들은 권력을 끝까지 누리고 제대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런 부대에서 그렇게 군 생활을 겪다가 제대했다. 그리고 36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 군에서 서로 때리고 맞는 일이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다니! 나는 당시 군 생활 중에 군대의 존재 이유를 알고 싶었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소설 대목처럼 왜 우리는 우리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고참들은 물론 그들이 속해 있는 우리나라 국민성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맞아서 신음하는 나의 엉덩이에 연고를 발라 준 인자한 고참도 있었다. 그러나 다수 고참들은 인격이 의심되는 짐승이었다. 한국인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나 직장인이거나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친구이다가 ‘완장’이란 권력을 쥐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런 회의 끝에 제대 후, 나는 정치나 권력과 관련된 직업은 죽어도 갖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교육자가 된 지금도 정치 냄새가 나는 곳에는 근처에도 가기 싫다. 그게 다 인간 같지 않은 가해자 고참들의 '더러운 국민성'의 기억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군에서 고뇌한 것은 ‘과연 우리 국민은 왜 이렇게 잔인한가’였다. 이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마야의 산 사람 심장 공양, 기독교의 마녀사냥,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생체실험도 있는데, 잔인성이 우리 국민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다. 흔히 국민성, 혹은 국민의 기질을 논할 때, 논리학의 ‘구성의 오류’와 ‘생태의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구성의 오류는 특정한 사람에게 가능한 일을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오류다. 소위 ‘엄친아’ 얘기를 들은 엄마가 아들에게 ‘너는 왜 그렇게 못하냐’고 다그칠 때 발생하는 게 구성의 오류다. 생태의 오류는 전체의 특징으로부터 어느 한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오류다. 대개 흑인의 범죄 발생률이 높으니 내 앞의 저 흑인도 범죄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생태의 오류다. 이 같은 생태의 오류가 최근 미주리 인종차별 사건의 원인일 것이다.

얼마전 드라마로 유명해진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에게 태조가 조선 8도 사람들의 특징을 말해달라고 묻자, 정도전이 답한 것이 <4자평(四字評)>으로 전해진다. 정도전은 여러 지역 사람들의 특징을 4자성어로 모두 표현했는데, 그 중 함경도를 ‘이전투구(泥田鬪狗)’라 했다. 함경도 사람은 진흙탕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개의 특질을 가졌다는 이 말을 함경도 출신인 태조가 듣고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태조는 아마도 생태의 오류에 근거해서 ‘나는 그렇지 않은데’ 라는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소설가 오영수 선생이 1979년에 <특질고(特質考)>란 소설을 <문학사상>에 실었는데, 각 도 사람들의 기질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소설화한 이것이 특정 지역을 비하했다고 해서, 그는 대단한 필화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밖에도, 언론인 이규태 씨는 풍부한 인류문화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칼럼을 모아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의 칼럼은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렸지만, 지나친 한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 균, 쇠>는 백인우월주의를 경멸하는 저서다. 백인이 잘나서 잘 나가는 게 아니고, 그들이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유럽에 쌀과 밀 같은 작물과, 돼지와 소와 말 같은 가축이 있었기에, 우월한 문명을 일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일종의 환경결정론으로, 백인 DNA보다 백인이 살았던 환경이 백인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해, 백인의 능력적 우수성이 백인 문명을 가꿨다는 이론은 일종의 주의론(主意論)인데, 과연 우리의 민족성은 환경의 산물이냐 국민의지의 집합이냐는 복잡한 논쟁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환경으로 보든, 의지로 보든, 전체 중심으로 보든, 개별 중심으로 보든, 국민성 논쟁은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빨리빨리 증후군’이란 우리 국민성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한국인이 많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 빨리빨리 증후군은 쉽게 끓고 쉽게 식는 ‘냄비근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세계가 놀라고 있는 한국의 초고속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자랑이라고 여기는 측면도 있다.

‘당파근성’이란 우리 국민성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일본은 우리 역사를 폄하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은 당파싸움하다가 망했다고 했다. 그들은 조선의 4색당파를 그 예로 들었다. 많은 국사학자들은 이런 일본의 지적을 식민사관이라 반박했다. 그런데 나라가 외세 앞에 풍전등화인데도 구한말의 당쟁은 지독했고, 일제강점기 독립 세력 사이에서도 이데올로기에 의한 당파가 있었으며, 강정마을, 밀양송전탑, 광우병 파동, 세월호 특별법 사태 등 지금의 여야 당쟁도 뿌리가 만만치 않게 깊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상황도 먼 훗날 역사가가 당파근성으로 볼까 두렵다. 물론 당파싸움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아프리카 르완다의 종족 싸움은 수백만 명을 죽게 했고, 태국의 붉은 셔츠와 옐로 셔츠 진영의 싸움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당파싸움은 아마도 민족을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특징일 것이다. 다만, 국가마다 시기마다 그 강도와 해결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밖에도, 불편한 진실 같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성도 있고, 한국전쟁과 초고속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우리가 유독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물질만능주의, 성공제일주의, 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한다는 견해도 있다.

국민성은 하나의 저변(低邊)이다. 저변은 밑바탕이란 뜻으로 통계적으로는 대다수를 의미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국민의 습성이 쌓여 근본을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국민성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무엇이 국민 일상생활의 저변을 이루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태권도 종주국이지만, 태권도 도장에 가면 조무래기 초등학생들뿐이다.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은 늘 엘리트 태권도 선수들 덕이다. 태권도 종주국을 순례하러온 외국의 태권도 마니아들이 한국의 초라한 태권도 현실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돌아간다. 우리가 활 잘 쏘는 동이족이라서 올림픽 양궁 메달을 독식하는 게 아니다. 양궁의 저변은 그런 자랑을 할 처지가 못 된다. 우리나라 펜싱,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도 모두 저변 없는 모래성이다. 우리나라 축구도 저변이 약하다. 조기축구회는 저변이 아니다. 유럽 축구의 유소년 육성제도나 10부 리그까지 있는 리그 승격제가 바로 유럽 축구의 저변이다.

미국의 축구(사커)는 우리 상식과는 달리 미식축구보다 저변이 넓다. 미식축구가 워낙 격한 경기다보니, 일반인은 보호 장비 없이 게임을 흉내 내기도 어렵다. 미국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식축구를 할 때는 태클대신 선수들 허리에 줄을 매게 하고 이 줄을 잡아 빼는 것을 넘어트린 것으로 간주하는 형태로 경기를 한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미식축구를 구경하기는 좋아해도, 직접 즐길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다. 미식축구를 직접 즐기는 경험은 해변에서 미식축구 캐치볼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미식축구는 미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스포츠다. 반면, 미국에는 온 나라 온 도시마다 연령별 축구 클럽이 있다. 미식축구의 부상 위험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축구가 다이어트에 최고이기 때문이다. 이게 저변이 되어, 미국 남자 축구는 세계 16강에 자주 오르고, 여자 축구는 세계 정상급이다.

국민 모두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요즘, 한국 골프는 저변이 넓다. 그래서 LPGA를 한국 낭자들이 장악할 수 있다. 요즘은 취미활동으로 사물놀이 등 국악 하는 학생들도 많고, 동네 골목마다 비보이와 백댄서 지망생들이 넘친다. 각종 예능 서바이벌 프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도 줄을 서 있으니, 이게 한류, K-pop의 저변이 되어, 한류는 아마도 오래 세계에 퍼질 듯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돌풍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과거에는 모범납세가 예외였고, 탈세가 보편적이었다. 요새는 구멍가게도 현금영수증을 받고 카드결제를 하고 있으니, 이제야 겨우 탈세가 예외가 됐다. 불과 몇 년 전, 음주운전은 운전자들 사이에 하나의 영웅적 모험담이었다. 이제는 대리운전 때문에 그럴 정도는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우리나라에서는 음주운전이 일상적 현상, 즉 저변이었다.

병영문화 개선, 모병제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게 국민의 저변이 변하지 않고는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는 게 문제다. 36년 전 내가 군 생활할 때 있었던 구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게 그 명백한 증거다. 노벨상을 한 명의 천재가 받았다고 그게 그 나라의 국력이 되지 않는다. 동네 꼬마도 구구셈 19단을 외운다는 인도의 수학 저변이 인도의 힘인 것처럼, 국민 심성의 저변은 본질적 변화가 와야 가능하다. 그 기간은 수십 년 내지 수백 년이 걸린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그 일은 오로지 교육밖에 해낼 수 없다. 백년지대계인 교육만이 100년 후 국가의 저변을 변하게 한다. 군대 문제든, 세월호 문제든, 문제의 저변이 넓으니,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교육의 저변도 넓어야 한다. 또 문제가 오래 됐으니, 그 해결을 위한 교육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런 교육의 시작은  모두가 피해자란 생각만 하지 말고 모두가 가해자란 생각에 주저 없이 동의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될 듯하다. 피해자 졸병이 가해자 고참이 되는 악순환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군대 폭력이 수십 년 계속 될 수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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