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관계 ‘스텔싱 주의보’...상대방 몰래 피임 도구 제거해도 처벌 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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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관계 ‘스텔싱 주의보’...상대방 몰래 피임 도구 제거해도 처벌 안 받아
  • 취재기자 조윤화
  • 승인 2018.04.0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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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상 스텔싱 처벌 규정 없어...관련 법 제정요구 청와대 청원 등장 / 조윤화 기자
연인과 성관계 시 상대방 몰래 피임 도구를 제거하는 ‘스텔싱’ 행위를 하더라도 현행법상 이를 처벌할 규정은 없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연인과의 성관계 때 상대방 몰래 피임 도구를 제거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현행법상 이를 처벌할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낙태가 금지돼 있으며, 콘돔 사용률은 11%(한국 여성의 성생활과 태도에 관한 10년간의 간격 연구, 박주현 서울대보라매병원 교수팀)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콘돔 사용률이 최하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 몰래 피임 도구를 제거해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더라도 여자를 보호할 방도는 어디에도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성관계 도중 상대방 모르게 콘돔 등 피임 도구를 제거하는 행위를 ‘스텔싱(stealthing)’이라고 한다. 익명의 네티즌 A 씨는 재작년 7월경 인터넷 커뮤니티에 ‘혼전임신 알고 보니 남편이 계획한 것이었네요’를 제목으로 한 글을 게재했다. 35세 여성이라고 밝힌 A 씨는 “남편의 핸드폰을 보던 중, 혼전임신이 남편이 계획했던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A 씨는 남편과 시동생의 대화 내용을 보던 도중 “남편이 시동생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면서 '여자와 관계할 때 포장해둔 콘돔을 꺼내는 척하면서 미리 구멍을 뚫어둔 것을 사용해 임신을 노리면 된다'고 했다”며 “시동생이 '네 형수도 그렇게 해서 지금 내 아내가 됐다'고 조언했더라”고 말했다.

A 씨는 “남편이 피임약은 몸에 안 좋다며 피임약 먹는 것을 극도로 말리고 무조건 자기가 직접 사 온 콘돔만 고집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아이들 때문에 금방 무너져 내린다“고 토로했다. 해당 게시글에는 ”외국에선 이런 식으로 원치 않는 임신시키면 강간죄에 해당한다“, ”남편이 범죄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라는 등 비난하는 댓글이 달려있다.

직장인 박모(34) 씨는 ”스텔싱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 자체가 충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낙태가 합법인 국가도 아니고, 만약 스텔싱 때문에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생 안모(22) 씨 또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상대방 합의 없이 몰래 피임도구를 제거하는지 모르겠다"며 “만약 스텔싱으로 임신해서 결혼까지 한 경우면 사기 결혼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스텔싱 피해자는 나오고 있다. 부산 성폭력 상담소 관계자는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중요하기에 사건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드릴 순 없지만, 스텔싱에 대한 피해를 호소하며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최근에도 있다“고 답했다.

상담소 관계자는 ”스텔싱 피해 여성이 가해자의 법적인 처벌을 원할 경우 무료 법률 상담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고 있다“며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여성이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법률구조법인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관계자는 “현재 스텔싱을 행한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못한다”고 못 박았다. 그는 ”성문법에 규정이 없으면 어떠한 것도 처벌할 수 없다“며 ”현재 스텔싱 처벌에 대한 규정은 없다“고 답변했다.

스텔싱 관련 총 4건의 청원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재됐다(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스텔싱에 대한 피해사례가 잇따르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관련법 제정을 요구하는 청원이 등장했다. 익명의 청원인 B 씨는 ”몇몇 나라는 스텔싱을 심각한 범죄라 보고 처벌 규정을 마련하고 있는데 한국은 폭행,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가 성립된다“며 ”인터넷상에서도 '스텔싱이 아빠가 되는 길' 등의 제목으로 그저 하나의 '유머'로 소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B 씨는 ”스텔싱에 대해 더욱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청원에는 9800여 명이 동참했다. 이 밖에도 현재까지 스텔싱 관련해서 총 4건의 청원이 게재된 바 있다.

해외에서는 스텔싱 행위에 법적인 제재를 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한국일보에 의하면, 작년 스위스에서는 스텔싱 행위를 한 47세의 남성이 성폭행 혐의로 유죄를 판결받은 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스텔싱을 성폭행으로 추가하는 주법 개정안이 작년 5월에 상정됐다.

현재 국내 강간죄 성립 요건은 ‘피해자가 저항하기 현저히 불가능한 상태’로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성폭력 심리상담 전문가들은 스텔싱의 경우 서로 간 합의로 진행된 성관계가 아닌 만큼,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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