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엄마들이 쫓겨나는 ‘수유실’…소파 점령하는 민폐족에 골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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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엄마들이 쫓겨나는 ‘수유실’…소파 점령하는 민폐족에 골머리
  • 취재기자 정인혜
  • 승인 2018.04.0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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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자리 뺏아놓고 "애 키우는 게 유세냐" 큰소리…더위·추위 피해 들어오는 노숙자들도 / 정인혜 기자
엄마와 아기를 위한 공간인 '수유실'을 개인 편의를 위해 찾는 사람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두 살배기 딸을 키우고 있는 김모(32) 씨는 최근 마트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 수유를 위해 수유실을 찾았는데, 이미 안에 있던 할머니들에게 쫓겨난 것. 수유실 소파에 앉아 마트에서 구매한 음식을 먹고 있던 할머니들은 김 씨에게 “먼저 들어왔으니 나가라”고 요구했다. 수유는커녕 동행한 아기도 없었지만, 할머니들은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김 씨는 “수유실에 전세 낸 것처럼 당연하게 앉아서 식사를 하던데, 수유실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지 항의해도 소용없더라”며 “마트에 신고하긴 했는데 시정됐는지 모르겠다. 정말 짜증 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와 아이를 위한 공간인 수유실에서 정작 엄마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수유실을 차지하려는 불청객들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유실에는 소파, 탁자, 개수대, 에어컨 등이 마련돼 있는데, 이들 불청객은 해당 시설을 사용하기 위해 수유실을 침범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유실 앞 팻말에 쓰인 ‘아기와 보호자를 위한 공간입니다’라는 문구가 무색한 실정이다.

주부 박모(40) 씨도 김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재래시장 수유실에서 식사 중인 아주머니들을 만난 것. 아주머니들은 메인 메뉴인 보쌈을 중심으로 향이 강한 장아찌 등의 밑반찬까지 죄다 깔아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기 기저귀를 갈던 박 씨는 아주머니들에게 “밥 먹는데 냄새난다”는 꾸중마저 들었다.

박 씨는 “여기는 아이들에게 수유하고 기저귀 가는 공간이라고 말씀드려도 꿈쩍도 안 하더라. 심지어 '애 키우는 게 유세냐'는 말도 들었다”며 “주변에 하소연했더니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많던데, 관리실에 건의해도 그때뿐인 것 같더라. 불쾌해서 다신 그 시장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주부들이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수유실 민폐족’은 단골 소재다. 최근 네이트판에도 이 같은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수유실에 별다른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할머니 세 분이 떡볶이, 순대 같은 분식을 펼쳐놓고 먹고 있었다”며 “음식 냄새도 냄새지만 자기네들 안방처럼 신발 벗은 채로 소파를 다 차지하고 있는데 수유하러 오는 엄마들은 앉지도 못하겠더라”고 말했다. 해당 글은 조회 수 6만 이상에 추천 수는 600을 기록하는 등 많은 주부 네티즌들의 공감을 샀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댓글도 줄줄이 달렸다.

광주공항에 설치된 수유실(사진: 해피랜드 코퍼레이션 제공).

여객시설 등의 공공기관들도 수유실 민폐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현행법상 터미널, 공항, 지하철 등 여객시설에서는 의무적으로 수유실을 설치해야 한다. 시설 측은 수유실을 침범하는 민폐족으로 단연 노숙자들을 꼽는다. 특히 덥거나 추운 여름과 겨울에 관련 민원이 많이 접수된다고.

부산 시외버스터미널 측은 “민원이 접수될 때마다 순찰을 강화하고 엄격하게 출입을 단속하고 있다”며 “수유실을 이용하려는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시민 의식 발전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주부 윤정은(35, 부산시 남구) 씨는 “아직까지도 수유실을 그냥 휴게실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며 “아이와 함께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시민의식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신고하고 단속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숙한 시민 문화가 조성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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