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도시 끄트머리...부산 ‘매축지 마을’
상태바
시간이 멈춘 도시 끄트머리...부산 ‘매축지 마을’
  • 취재기자 조소영
  • 승인 2014.08.18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낡은 마을 탓에 <친구><아저씨>의 배경이 되기도...재개발은 엄두도 못내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촘촘히 집이 박혀있다. 파란 대문은 녹이 슬어 곳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있고, 그 위에는 곧 떨어질 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낡은 회색 집들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컴푸터 인장 조ㄱ’이라고 사라진 글자를 그대로 안고 있는 간판이 여럿 걸려 있다. 세월이 1970년대에서 멎어 있는 듯한 이곳은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자리 잡은 ‘매축지 마을’이다.

▲ 매축지마을 지도와 마을에 있는 시계방(사진: 취재기자 조소영)

매축지 마을은 바다를 메워 마을로 만들었다고 해서 매축지(埋築地) 마을이라 불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바다였던 매축지 마을 일대를 매립했다고 한다. 이후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많은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이주해오면서 매축지에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매축지 마을은 부산진역 철로와 북항 부두의 컨테이너 도로 사이에 삼각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지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매축지 마을의 시간은 다른 지역보다 느리게 간다. 매축지 마을에서는 고층빌딩은 고사하고 흔한 빌라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집, 녹슨 대문,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이 매축지 마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매축지마을의 골목(사진: 취재기자 조소영)

매축지 마을 주민들은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저소득가구 등 사회 취약계층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매축지 마을의 진짜 이름은 범일 5동이다. 부산시 자료에 의하면, 2013년 범일 5동의 전체 인구는 5,660명이고, 이 중 65세 이상이 20%를 차지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매축지 마을에서는 특별한 생산 활동이 일어나지 않아 이곳 주민들에게는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다. 마을 안에 미용실, 음식점, 세탁소 등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가게가 있지만, 마을 주민끼리 사고파는 구조다. 매축지 마을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이귀자(64) 씨는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지요, 뭐”라고 말했다.

그런 매축지 마을이 영화 촬영지가 되면서 관광객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멎은 마을 모습 덕에, 매축지 마을이 과거 못 살던 우리 모습이 배경이 되는 영화들의 단골 촬영지가 됐다. 2001년에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 2004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의 배경이 됐다. 2010년에는 원빈 주연,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의 촬영지가 되면서, 매축지 마을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매축지 마을 주민 협의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산시가 주민 역량 강화사업을 시행하면서 제공한 돈을 벽화그리기 등에 투자해 마을의 볼거리를 만들었다.

매축지 마을이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느는 것에 대해 호의적인 주민이 많다. 늙은이들만 사는 마을로 과거 우리나라 모습을 보러오는 젊은 사람, 한류를 통해 알게 된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는 외국인 등 새로운 사람들이 몰러 오니 마을에 활기가 차고 생기가 돈다는 것이다. 매축지 마을에서 50년 이상을 살았다는 김경자(71) 씨는 “학생들도 사진기를 들고 오고, 외국인도 보이는데, 항상 사람이 그리운 우리에게는 참 반가운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방문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주민도 있다. 관광객들 중 일부가 집이나 가게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보는가 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생활 모습을 촬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고 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매축지 마을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유정길(56) 씨는 “함부로 사진을 찍어대서 성가시다. 여기에 사는 사람을 동물처럼 구경하는 것 같고,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다.

매축지 마을 어려움은 이뿐 아니다. 근 30년간 지속돼온 재개발 문제로 많은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매축지 마을에 처음 재개발 얘기가 나온 것은 1990년이다.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이주하자, 매축지 마을의 인구는 줄어갔다. 이 때 재개발 사업은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그러나 재개발이라는 것은 국가 혹은 시에서 예산을 들여 집수리, 공사 등을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조합을 만들고 시공사를 선정해 아파트를 짓는 것이 재개발이다. 부산시청 도시 개발 담당자는 “재개발은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하는 사업이 아니고, 저소득 계층을 도우려는 의도에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어서, 각자가 재개발에 드는 재원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일 5동 중에서 매축지 마을이 아닌 일부 지역은 재개발을 거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나 매축지 마을 주민 다수는 생계능력이 없는 노인이라 재개발 꿈은 멀기만 하다. 매축지 마을 재개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매축지 마을의 젊은 인구는 줄어들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비율은 더 늘어가고 있다. 매축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명호식(74) 씨는 “재개발하자며 말이 돌아서 이도저도 못하고, 젊은이들은 사라져가고, 어떻게든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축지 마을은 오늘도 낡은 집들에 싸여 뜨거운 여름 햇빛을 받고 있다. 

▲ 재개발이 이뤄진 아파트 (사진: 취재기자 조소영)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