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 말 많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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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이 말 많은 이유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4.06.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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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욕하기를 좋아한다. 이사를 가게 되면, 나는 가장 먼저 집 주변에 단골 목욕탕부터 만든다. 그런데 대한민국 목욕탕 안에는 대개 목욕탕 주인이 쓴 각종 안내문이 걸려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탕에 들어 갈 때는 샤워를 하고 들어가라든지, 타월은 한 장씩만 사용해 달라든지, 냉탕에서 물장난하지 말라든지, 옷장 앞에서 옷을 털지 말라는 등의 내용들이 적혀 있다. 나는 그런 글을 볼 때마다 그 안내문의 맞춤법과 표현의 정확성을 항상 살핀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20년 넘게 학생들에게 기사쓰기를 가르치고 또 그들의 기사를 고쳐주다 보니, 우습게도 목욕탕의 각종 안내문은 물론, 길가, 식당에서 보이는 각종 광고문이나 현수막, 그리고 안내문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공중 화장실 낙서를 봐도 글이 제대로 씌어 있나 살피게 되는 직업병이 생겼다. 그런 일반인들이 쓴 글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국어적 오류 없이 깨끗하게 표현된 글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면, 너무 짧아 문법적 실수를 저지를 여지가 없을 때뿐이었다.

총리 지명자가 과거의 글과 말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그의 직업이 언론인이었으니, 남긴 글과 말이 많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탈도 많은 듯하다. 나는 여기서 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번 사안에 대해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남의 말과 글을 놓고 언론이나 SNS에서 벌어지는 설전(舌戰)을 보면, 대상은 하나인데 왜 이런 극단적으로 상이한 해석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언제나 든다. 심리학자 알포트(Allport)는 그 유명한 ‘편견 실험’을 통해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심리적 특성, 즉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그 사물에 대한 정상적 인지를 방해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그래서 오늘날 같은 대상을 두고 벌어지는 양극단의 여론은 대개 이념적 편견이 원인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남의 말을 판단할 때, 내가 여기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이념적 편견 이전에 우리나라 국민들의 말하기, 쓰기, 듣기, 읽기 능력, 그리고 우리나라 국어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마치 목욕탕 주인들의 간단한 안내문조차도 100점짜리 글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말한 사람도, 그 말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도 다 국어 사용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말 자체가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에 어려운 특징을 지녔거나, 아니면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2003년 미국에 체류할 때,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나는 하루 종일 CNN을 봤다. 당시 이라크 전쟁은 ‘안방에 생중계된 인류 최초의 전쟁’이라 불릴 만큼 각종 미국 뉴스 매체들은 하루 종일 이라크 전황과 바그다드 상태를 특파원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했다. 그런데 언론학자인 나에게 특이하게 보인 점은 그 많은 미국 방송의 특파원들이 원고 없이 바그다드 시내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즉흥적으로 소위 ‘애드립(ad lib)’으로 방송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월호 사건 때, 우리는 한결같이 기자가 서두만 몇 초 간 마치 원고 없이 방송하는 척 몇 마디 하다가 곧바로 그 기자는 화면에서 사라지고 현장 화면으로 바뀌는 TV 생중계를 수없이 봐왔다. 기자는 첫 몇 마디를 외워서 즉흥 보도하다가 곧바로 원고를 손에 들고 읽는데, 화면이 현장으로 늦게 넘어가는 바람에 원고를 읽는 기자의 모습이 TV 화면에 비추이는 ‘방송 사고’를 우리는 가끔 보며 낄낄 웃기도 한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기자들은 5분, 또는 10분 이상 거리에 서서 이말 저말 마구 현장을 스케치하고 주변 정보를 신기할 정도로 리포트하곤 했다.

이게 무슨 차이일까? 한미 기자 간 훈련의 차이일까, 아니면 전문성의 차이일까? 물론, 기자 교육 시스템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에게 말하기 교육을 시킨 적이 없다. 국민 전체가 말로 조리 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말하기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기자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건 기자 책임도, 우리 교육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말 자체의 특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타이어계인 우리말은 어미 활용과 조사를 통해서 시제를 표현하고 문장 구조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가고’ ‘가니’ ‘갔기 때문에’ ‘갔다가’ 등등, 이런 식으로 모든 단어들에 조사를 붙이거나 어미 활용을 해서 문장을 만들어야 가야 하니, 우리는 앞에서 어떤 어미 활용을 했느냐, 어떤 조사를 썼느냐는 것을 잘 기억해야 다음 문장을 앞 문장과 호응되게 완성할 수 있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반면, 영어는 시제를 말하기 위한 동사 활용을 제외하고는 단어 배열만 맞추면 문장이 되는 언어다. 문법을 생각하며 조사를 단어마다 붙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즉흥적인 연설이나 사적인 대화를 녹취록으로 바꿨을 때, 한국어는 문법적 오류가 많고, 영어는 상대적으로 오류가 적다. 이런 언어적 특성이 한국 기자가 애드립에 약한 원인일 수 있다.

국어는 단수 복수 개념도 허술하다. 국사학자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을 영역한 미국의 한국사학자가 변역 과정에서 수시로 원저자인 이기백 교수에게 문의한 내용이 단수 복수 문제였다고 한다. 구한말에 미국 배가 조선에 쳐들어와 개항을 요구했다는 원문에 대해 미국학자는 배가 몇 척이 왔냐고 질문하곤 했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배 한 척(a ship)인지 배 두 척(two ships)인지를 문법적으로 꼭 밝혀야 하지만, 한국어법에는 그냥 “배가 왔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에는 주어 개념도 약하다.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주어를 의식하지 않고 말한다. 그래도 소통에 지장이 없다. 영어로는 “지금 몇 시냐?(What time?)”라는 물음에 “오전 10시다(10 a.m.)"라고 답한다. 주어가 없기는 우리말과 같으나, 여기에는 가주어 ‘it’가 생략돼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하는 데 아무 불편이 없었지만, 외교문서, 뉴스 문장, 정치권 성명서, 언론인 칼럼, 학술논문, 법정 판결문의 글자 하나하나가 해석 불일치의 불편함을 낳고 있다. 이는 다분히 우리말의 이런 언어적 특징과 관계가 있다.

나는 과거에 내 아이들 학교에서 보내온 가정통신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역시 직업병이 도저서 학교 선생님들이 쓴 글은 문법에 맞고 표현이 정확한지를 살피곤 했다. 그것은 띄어쓰기부터 어디 하나 교육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부적절할 정도로 문법적 오류투성이였다.

가끔 전문학술지에서 교수들의 논문심사 의뢰가 온다. 교수들의 논문은 어떨까? 말할 필요도 없이 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교수들도 정확한 글쓰기를 정규 교육기관에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사 논문을 읽다보면, 문법적 오류는 기본이고, 표현의 정확성에도 문제가 많다. 결국, 학자들의 이런 국어 구사 능력의 한계가 우리나라 학술논문의 독이성과 대중성을 떨어트릴 수 있고, 나아가 표절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석박사 학생들에게 논문을 쓸 때 주어를 명시하라고 다그친다. 대개 학술논문에서는 연구자 본인을 ‘나’라는 1인칭으로 지칭하지 않는 게 관례다. 그래서 나는 지도 학생들에게 ‘나’ 대신 ‘본 연구’ 또는 ‘이 연구’ 등으로 '나'라는 1인칭 주어를 대체해서 사용하라고 한다. 그리고 각주만 달지 말고 “미국의 00 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본 연구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논문을 작성하라고 주문한다. 각주를 달았다고 해도 인용해온 연구자의 이름을 주어로 써야 자기의 주장과 남의 주장이 논문에서 구분되며, 그래야 원천적으로 표절 시비가 사라진다.

신문 기사 문장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일반인들이 아마 가장 자주 접하는 한국어 문장은 종이 신문이든 인터넷 신문이든 뉴스 문장이다. 그런데 대개의 한국어 문법책에서 문법적 오류나 비문(非文) 사례로 드는 것이 신문이나 소설 문장이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전문적으로 교정을 본 후에 출간된 소설보다는 날마다 쏟아지는 신문 문장이 문법책한테는 호구처럼 항상 오류투성이 글의 사례로 더 많이 선택된다.

NIE(Newspaper in Educatrion)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신문활용교육’을 가리키는데, 초중고등학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을 학생들에게 학습시키는 데 신문 기사를 학습 보조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NIE 관련 세미나에 갔을 때마다 우리나라 신문은 교실에 들어 올 수 없다는 급진적 주장을 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 신문사의 기사 내용은 충분히 교육적 가치가 있으나, 그들 기사 문장의 문법적 오류 때문에 교과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학생들의 국어, 수학, 과학 등 일반 교과서에 문법적 오류가 많다는 뉴스가 실제로 있었다. 그런 신문이 자기들 문장에는 문법적 오류를 담고 있는 게 우리 국어의 자화상이다.

영국의 <더 타임즈> 지는 영국 영어의 자존심이라고 한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 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단어가 실릴 수 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에 기자 교육을 받았다. 기자 교육의 첫 단계는 문법과 표기법이었다. 미국 교수는 목수의 작업 도구가 망치이듯이 기자의 작업 도구는 언어라 했다. 자기 직업의 기본적인 작업 도구를 바르게 다룰 줄 알아야 직업적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교수의 지론이었다. 바른 글쓰기, 이게 미국 기자 교육의 첫걸음이며, 내가 경험한 미국 기자 교육은 이렇게 ‘기자 문법’부터 시작됐다.

최근 한류 붐을 타고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인용 한국어 시험인 토픽을 치는 외국인은 세계적으로 한 해에 수십 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나 ‘우리말’은 붙여 쓰고, ‘우리 집’은 띄어 쓰도록 돼 있는 우리말 맞춤법을 어찌 해야 좋을까? ‘국가정책’은 붙여 쓰므로 사전에 표제어로 나온다. 그러나 ‘국가 안보’는 띄어 쓰도록 돼 있어, 사전에서 ‘국가’를 먼저 찾고 이어서 ‘안보’를 찾아야 그 전체 단어 뜻이 파악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국어를 아는 외국인들이 사전을 찾아도 우리말 신문 읽는 게 쉽지 않다. 띄어쓰기는 사전 표제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항공우편의 영어 단어 ‘airmail’은 어디서나 ‘airmail’이지 ‘air mail’이 아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어느 캐나다 교환 교수가 나에게 왜 한글은 영어와 같은 음소문자이면서 자음과 모음을 영어 알파벳처럼 풀어 쓰지 않고 음절로 모아 쓰냐고 질문했다. 한글 창제 당시, 아마도 한자(漢字) 영향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비전문가인 내가 답했지만, 그게 정답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한글이 비록 과학적이어도 우리말 표기법은 외국인들에게 골치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또 외국인들에게 일본어를 영어로 오랫동안 교육했던 일본인 부인을 만난 적도 있다. 그 부인은 한류 팬이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외국인용 한국어 교과서가 체계적이지 못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우리도 모르는 띄어쓰기를 과연 한국어 교과서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 기회에 우리 국어교육은 독해 위주가 아니라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교육 체제로 재편돼야 한다. 국문법과 맞춤법도 재정비돼야 한다. 제발 사전을 찾지 않아도 ‘있을 뿐이다’는 띄우고 ‘너뿐이다’는 붙인다는 사실을 대학 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문법이 쉬워졌으면 좋겠다. 최근에는 문자 메시지가 판을 치니, 아예 국어 죽이기가 더 당당하다. TV 프로그램에서 난무하는 자막은 문법적으로 거의 막가파 수준이다. 국어학자들도 띄어쓰기에 자신 없다고 고백하는 판에, 나도, 총리 지명자도, 언론인들도, 소설가들도,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도 바른 글쓰기와 바른 말하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칼럼을 국립국어원에서 문법적으로 채점한다면 분명 100점이 아닐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정권이 바뀐다고 국민 안전이 개선되리란 보장이 없다. KBS 사장이 경질된다고 KBS의 정권 편향이 바뀔 리 없다. 세상 문제에는 다 본질적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적 주장에 의해 문제의 표피는 바뀔지 모르나,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총리 지명자를 둘러 싼 말싸움을 보면서, 나는 말한 사람이나 그 말을 해석하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 국어, 그리고 국어 교육과 연계된 문제를 지녔다고 느꼈다. 단기적으로는 청문회와 같은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총리 문제는 어떻게든 지나가리라.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어 문제는 참으로 멀고도 깊은 곳에 박혀서 오래도록 손도 못 대고 남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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