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한 고등학생에게 용기를 준 어느 미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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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한 고등학생에게 용기를 준 어느 미군 이야기
  • 칼럼니스트 손정호
  • 승인 2014.05.26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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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 꿈은 조종사든 정비사든 아무튼 ‘비행기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고무동력 비행기 날리기 대회에서 받은 장려상 하나가 짜릿한 흥분과 함께 나를 마구 그렇게 몰고 갔다. 비행기 날리기 대회가 없을 때도 나는 용돈을 모아 모형 비행기를 사서 날렸고, 비행기가 날 수 있는 원리인 양력이란 단어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공부했다. 나중에는 아무 설명서 없이 폐품으로도 준수하게 날아가는 모형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됐다. 그 열정은 중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이어져, 나는 항공 관련 학과로 대학 진로를 결정했고, 어느새 내 방 천장에는 모든 전투기의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의 일본식 준말로 조립식 장난감을 일컫는 용어로 널리 쓰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세계의 전투기와 그들을 실어 나르는 항공모함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부산항에 미국 항공모함 인디펜던스 호가 입항한다는 신문 토막 기사를 읽게 됐다. 그 기사에 난 작은 흑백사진에서 나는 그 항공모함에 F16을 비롯한 각종 최신형 전투기가 탑재된 사실을 즉시 알아채고 무조건 그곳에 가서 최신 전투기를 봐야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친한 친구를 꼬셔(?) 야자(야간자율학습)를 도망쳤다. 그곳은 여러 개의 부산항 부두 중 한 곳인 해군기지였으나, 평소에 어디가 해군기지인지를 알지 못했던 나와 친구는 해군기지를 찾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밤늦게 도착한 부대 앞은 이미 차단돼 있었다. 군부대 큰 건물 뒤에 가려진 항공모함은 아주 일부분밖에 보이지 않아서,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그때 한국사람 한 명이 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안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쏘리?”하면서 영어로 대답하는 게 아닌가! 허걱, 그는 한국사람이 아니었다. 친구와 나는 영어 시간에 배운 짧은 단어로 더듬더듬 한마디씩 영어를 이어갔다. 그것도 어려워, 우리는 책가방에 들어 있던 영어시전을 꺼내 단어를 찾아가며 간신히 우리가 고등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우리는 비행기를 좋아해서 왔는데 항공모함을 구경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내일 오후 6시에 다시 이곳 정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전투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톰’이라는 그의 이름만 기억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무서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날 ‘도주 전과’에 대해 혼쭐이 났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났는지, 나는 오히려 오늘 저녁 톰과 약속했으니 꼭 다시 해군기지로 가야한다고 담임선생님께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너무 쉽게 “그럼, 가봐”라고 허락하시는 게 아닌가! 친구와 나는 당당하게 야자를 생략하고 약속 시간 저녁 6시에 맞춰 그 부대 앞으로 갔다. 톰은 정각 6시에 제복을 입고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항공모함의 2등 항해사 중위였다.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아마 2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굴이 우리 동네 형님과 다를 바 없었으니, 내가 어찌 그를 외국인으로 알았겠는가.

어쨌든 그는 우리 둘에게 출입증을 받게 해준 다음, 인디펜던스 호를 구경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항공모함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 크기와 높이는 실로 내 상상을 초월했다. 수천 명의 승무원이 항공모함에서 일한다는 톰의 설명에 우리는 더 놀랐다. 플라스틱 장난감으로만 보던 것들이 실물로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격납고와 활주로에 있는 톰켓(F16)를 보면서, 나는 ‘이게 이렇게 큰 전투기였어!’ 하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톰은 내 얼굴 만한 햄버거도 건네주며 먹으라 했다. 한국에서 볼 수도 없었던 전투기는 물론 미국 햄버거를 먹어보다니, 톰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내가 갖게 해줬다.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안면도 없는 나에게 말이다.

그가 부산항을 떠난 뒤, 나는 편지로 그와 소식을 이어갔다. 고3 때 그가 다시 항공모함을 타고 부산에 온다는 편지를 받고, 나와 톰은 꿈같이 재회하게 됐다. 그때는 더 자세하게 항공모함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얼마나 반갑고 즐거웠는지. 그동안 내 영어실력도 조금 더 나아져서, 우리는 사전 없이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후 당시 함께 동행했던 친구는 해양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나는 목표하던 항공 관련 대학으로 진학하는 게 여의치 않아 신방과로 급선회했다. 이 일은 비록 20년이 넘은 추억이다. 어린 나에게 신세계를 체험케 한 그 미군 장교는 나에게 큰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했다.

지금 난 기억 속의 톰보다 훨씬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거나 덕을 베풀지 못했다. 나는 홍콩이라는 살기 쉽지 않은 도시에 산다는 이유로 매순간 사는 데 급급했고 내 앞가림에만 분주했다. 톰은 그가 가진 것을 헤프게 쓴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호의를 내게 베푼 것이지만, 난 그런 작은 것조차 남에게 베풀지 못한 것 같다. 이제라도 그를 기억해 냈으니, 작지만 의미 있는 일들을 남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부끄럽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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