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대표는 ‘적당하게’ 회피말고 ‘척당(倜儻)하게’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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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대표는 ‘적당하게’ 회피말고 ‘척당(倜儻)하게’ 나아가라
  • 논설주간 강성보
  • 승인 2018.01.0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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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주간 강성보

법조인들은 사자성어 등 한자로 된 명언을 즐겨 쓴다. 대법원장, 법무장관, 검찰총장, 변호사협회장 등 법조 3륜 고위 관료의 퇴임사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중국 고전에서 따온 명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언론은 각 퇴임사에 인용된 이들 명구의 함의를 분석하고 퇴임하는 인사의 심경을 헤아리는 기사를 게재하곤 한다.

지난해 가장 큰 울림을 가져다 준 고전 명구는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현 고려대 교수)이 퇴임사였을 것이다. 이 재판관은 3월 10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인용 주문을 낭독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헌법재판관 8명의 전원일치로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론을 읽어내리는 순간, 대한민국의 역사는 새로운 장면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 재판관은 바로 그 사흘 뒤인 3월 13일 퇴임하면서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면서 대통령 탄핵의 전면에 섰던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이 구절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법가(法家)의 대표 한비자(韓非子)의 육반(六反)에 나오는 "법지위도전고이장리(法之爲道前苦而長利)"를 풀이해 인용한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2017년 3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재에서 퇴임식을 갖고 있다(사진: 더 팩트 이덕인 가자, 더 팩트 제공).

오랫동안 법관으로 봉직하다 퇴임한 뒤 한 지방에서 원로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한 지인은 웬만한 한학자를 뺨칠 정도로 한문에 정통하다. 그의 사무실에 가면, 한문 서예로 적힌 액자와 병풍이 사방에 내걸려 있다. 그 자신 직접 한시를 짓기도 한다. 얼마전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이들 액자와 병풍을 감탄스럽게 훑어본 뒤 "왜 법조인들은 한자 명구를 좋아하고 한학에 정통한가"라고 질문한 바 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우리가 법조인이 되기 위해 공부할 때 법전은 전부 한자 투성이였다. 자연히 한자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하다보니 한문의 오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는 다소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검사 출신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한문 명구를 즐겨 사용한다. 지난달 22일 성완종 뇌물수수 사건의 대법원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폐목강심(廢目降心)’의 세월을 살아왔다”고 말하던 장면이 TV를 통해 온국민에게 방영됐다. 여기서 폐목강심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흔히 동원되는 글귀다. 하지만 1심 유죄 판결 후 그의 행보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그의 폐목강심 심경에 선뜻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그는 지난해 대선 출마, 자유한국당 대표로 활약하는 도중 강력한 마초형 메시지를 연거푸 쏟아냈다. 특히 정치 경쟁자들과 거칠게 다투는 그의 행태와 막말에 가까운 그의 어휘들은 폐목강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선 과정에서 SBS가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집권하면 SBS를 없애버리겠다”고 공언하고, TV 토론 도중 상대방 후보를 향해 “초딩수준 정치인”이라 욕하고, 자유한국당 경선 과정에서 “나는 싸움의 천재”라고 장담하는 그에게 폐목강심, 분노를 다스리는 초탈자의 이미지는 눈꼽만큼도 비쳐지지 않았다. 말따로, 행동따로즉, 언행별개(言行別個)가 그의 본령인지도 모르겠다.

홍 대표가 즐겨쓰는 말 중 ‘즐풍목우(櫛風沐雨)’도 유명하다. 작년 2월 성완종 사건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지난 35년간 즐풍목우의 자세로 오로지 국민과 국가만을 바라보며 일해왔다”고 말했다. 직역하면 “바람에 머리를 빗고, 비에 몸을 씻는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의 천하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홍수를 막는데 궂은 일을 마다않은 중국 고대 우(禹) 임금을 평가하는데 동원됐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긴 세월 이리저리 떠돌며 갖은 고생을 다해 노력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치인과 공직자의 자세로 종종 인용되는 문구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가 2017년 5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남용희 기자, 더 팩드 제공).

홍 대표는 당대표 당선 뒤인 작년 7월 4일 국립현충원을 찾아서도 방명록에 이 말을 썼고 당 대표실에 이 ‘즐풍목우’ 네 글자가 적힌 액자를 걸어놓았었다. 영원한 비주류로 ‘도꼬다이’를 자처했던 그가 숱한 난관을 이겨내며 대선 후보에 나서고 제1야당 대표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보면 즐풍목우가 실감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최소 6개 광역단체장 승리를 장담한 그에게는 새해들어서도 즐풍목우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홍 대표는 당대표실 액자를 즐풍목우에서 ‘승풍파랑(乘風破浪)’으로 교체했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나간다’는 뜻으로 원대한 포부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 종각(宗慤)이 14세 나이로 숙부였던 대장군 종병(宗柄)의 베트남 원정에 수행하면서 장차 무엇이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원승장풍파만리랑(願乘長風破萬里浪: 거센 바람을 타고 만리의 거센 물결을 헤쳐나가고 싶습니다)”이라고 말해 숙부를 탄복케 했다는 고사에서 인용된 구절이다. 홍 대표는 ‘승풍파랑’으로 액자를 교체하면서 “‘질곡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한마음으로 큰 바다를 헤쳐나가자’는 다짐을 담았다”고 말했다.

새해 홍 대표가 넘어야 할 파도는 하나 더 있다. 대법원 판결로 성완종 리스트의 부담을 털어버리는가 했는데 판결 직후 한 인터넷 TV에서 홍 대표의 증언이 거짓임을 나타내는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그 증거는 2011년 6월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뇌물 전달자로 지목된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이 뇌물 전달의 현장, 즉 당시 홍 의원의 국회 사무실에서 봤다고 주장한 액자다. 그 액자엔 ‘척당불기(倜儻不羈)’란 매우 낯설고 어려운 한자 사자성어가 적혀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홍 대표 측은 이 액자가 자신의 의원 사무실이 아니라 당시 한나라당 당대표 사무실에 걸려있었다면서 윤승모 씨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윤승모 씨는 자신은 당대표실에는 가본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홍 의원 사무실에서 본 ‘척당불기’ 액자 중 ‘척(倜)’자는 매우 낯선 한자라 뚜렷이 기억한다면서 자신의 뇌물 전달 사실이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1심 판결은 윤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홍 대표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으나 2심 항소심에서는 윤 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던 점을 들어 진술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 상고심은 항소심의 심리가 법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인정, 무죄를 확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확정 판결 직후, 뉴스타파는 뇌물 전달이 시점(2011년 6월 11일) 몇 달 전인 2010년 8월 4일 홍준표 의원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의 6분짜리 녹화필름을 발견해 그 의원실 벽에 윤승모 씨가 주장한 ‘척당불기’ 액자를 확인한 것이다.

뉴스타파의 보도를 접한 홍 대표 반대 세력은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을 표명했다. 한 민주당 인사는 “홍 대표가 법리적으로는 무죄를 받았고 일사부재리에 의거, 더 이상 법정에 끌고갈 수는 없지만, 홍 대표의 증언이 거짓이었던 사실이 드러난 만큼 정치적으로는 유죄”라면서 ‘척당불기’를 패러디해 ‘적당불가(適當不可: 적당히 해선 안된다)’라고 일갈했다.

홍 대표는 세모 마지막 날 가진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앵커의 질문에 “재심에 말려들어갈지도 모르는 만큼 일체 대답않겠다”고 일축하고 “(윤승모 씨의 뇌물 전달 증언이) 사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잘라 말했다.

기개있을 ‘척(倜)’ 자와 빼어날 ‘당(儻)자, 그리고 멍에 ’기(羈)‘자 등 최고급 난이도의 한자들로 구성된 사자성어 ‘척당불기’는 “큰 뜻과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미가 강건하고 풍기는 기운이 담대하다. 마초라는 이미지를 가진 홍준표 대표에게 딱 어울리는 문구라 할 수도 있을 듯 싶다. 문제는 그의 속내도 그러하냐는 점이다. 표리부동(表裏不同), 즉 겉과 속이 달라서는 남들로부터 위선자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이 '2018년 무술년' 새해 첫날인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단배(團拜·신년인사회)식을 연 가운데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원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사진: 더 팩트 이새롬 기자, 더 팩트 제공).

홍 대표는 법정의 고비는 넘긴 만큼 성완종 뇌물수수의 진실을 지금이라도 속시원하게 털어놓은 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척당(倜儻)하게’, 즉 ‘기개있고 담대하게’ 정치적 진로를 개척해나가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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