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랭한 기부문화①] "기부 단체 못 믿겠다" 얼어붙은 기부금 '기부 포비아'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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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한 기부문화①] "기부 단체 못 믿겠다" 얼어붙은 기부금 '기부 포비아' 확산
  • 취재기자 신예진
  • 승인 2017.12.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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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까지 실시하는 '희망 2018 나눔 캠페인' 모금액 16.2% 그쳐 / 신예진 기자

기부가 이어지는 따뜻한 연말연시는 이제 옛말이 됐다. 최근 이영학 사건과 새희망씨앗 사회복지단체 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선의의 기부문화를 악용하는 사례를 접한 시민들이 기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것. 추운 날씨에 기부 문화까지 얼어버린 셈이다.

11일 오후 부산 2호선 한 지하철역에서 만난 구세군 자원봉사자는 “작은 한 푼을 내놓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아쉬워했다. 이날 봉사자는 종을 울리며 “어려운 이웃을 도웁시다”라고 외쳤지만 쏟아지는 발걸음 속 눈길을 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작년보다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팍팍해진 것 같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그가 느낀 차가운 기부 문화 현실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내년 1월까지 실시하는 대표적인 연말 기부금 캠페인 사랑의 열매 ‘희망 2018 나눔 캠페인’의 모금액은 현재 목표액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목표액은 3994억 원이다. 11일 현재 648억 원으로 약 16.2%에 그치고 있다. 지난 2015년 같은 시기에는 690억 원이 모금된 것을 비교했을 때 아쉬운 수치다.

최근 기부 단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져 기부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한국 구세군의 자선냄비(사진: 한국 구세군 홈페이지).

주변에서 알아주는 기부왕인 직장인 서민영(27, 경남 창원시) 씨도 최근 기부를 자제하고 있다. 서 씨는 “최근 단체에 하는 기부를 자제하기 시작했다”며 “주변 사람들이 상처만 받지 않는다면,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기부하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일”이라고 조언했다. 서 씨는 이어 “내가 낸 돈이 누군가의 술값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억울해서 가슴을 친다”고 말했다.

결연 아동을 위해 매달 3만 원 씩 꾸준히 기부하는 대학생 신소희(20, 경남 창원시) 씨도 최근 잇따라 터지는 기부 관련 사건에 찝찝함을 지울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신 씨는 결연 아동이 아니면 진작 기부를 끊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신 씨는 “결연을 맺은 아이와 직접적으로 연락할 순 없으니 ‘제대로 썼겠지’ 하며 기부 단체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며 “깜깜이 기부금 사용 내역에도 아이를 생각해 기부를 끊지 않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부단체에 대한 불신을 갖는 이는 단지 서 씨와 신 씨뿐만이 아니다. 최근 시민들 사이에선 내가 기부한 돈의 사용처에 대한 의심이 높아지며 ‘기부금 단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기부 포비아가 번졌다. 이는 ‘기부’와 공포증을 뜻하는 ‘포비아(phobia)’를 합친 신조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2016년 전국 성인남녀 203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나눔 실태 및 인식 현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1년 동안 기부 경험이 없다는 응답자 964명 중 23.8%가 기부를 기피하는 이유로 ‘기부를 요청하는 시설, 기관, 단체를 믿을 수 없어서’란 응답을 택해 2위에 올랐다. 1위는 52.3%를 차지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다.

G 기부단체 관계자는 기부에 대한 냉랭해진 공기를 현장에서 느끼고 있다. 그는 “최근 들어 기부금 내역서를 요청하는 분들이 늘어났다”며 “어떤 분들은 다짜고짜 돈을 엉뚱한 데 쓰는 게 아니냐고 역정을 내기도 하더라”고 씁쓸함을 내비쳤다. 그는 이어 “전화로 들어오는 불만들을 듣고 있다 보면 때로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최근 설 곳을 잃은 기부 문화가 단지 ‘이영학 사건’ 때문만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이영학 사건을 포함해 올해 기부단체를 둘러싼 잡음이 기부금 기피 현상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 이와 더불어, 최근 소규모의 기부금 단체가 난립해 기부를 강요하는 분위기도 시민들이 기부에 싫증 난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한 전문가는 “기부 포비아가 확산되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며 “이와 관련한 사회적, 제도적 개선이 분명 필요해 보인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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