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휴일일 뿐"...고향 안 찾는 사람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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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휴일일 뿐"...고향 안 찾는 사람들 많다
  • 취재기자 손병준
  • 승인 2014.02.0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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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 공부, 알바 핑계, 부모는 "전통 사라진다" 탄식

설 전날, 대학생 박모(25) 씨는 모처럼 설날을 맞이해 부모님과 함께 고향 큰집인 경남 부북면 덕곡리를 찾아갔다. 큰집에 도착 후 문 앞에서 벨을 누르자, 미리 와 있었던 친척들이 박 씨네 가족을 반갑게 맞이했다. 박 씨는 친척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고 또래 사촌들과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져도 박 씨와 동갑 사촌인 고모 아들 민호가 보이지 않았다. 박 씨는 고모에게 민호는 언제 오는지 물어봤지만, 고모는 이번에 민호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설날과 추석과 같은 명절 연휴에 고향을 찾아 친척들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가까운 친척부터 먼 친척까지 고향으로 내려와서 그동안 못 보던 얼굴을 다시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할 설날 명절 연휴에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찾아오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 자취하는 대학생 주모(26) 씨는 올해 설 명절에 본가를 가지 않는다. 설날에 아르바이트생이 부족해서 시급이 오른다는 점을 이용해 목돈을 벌기 위해서다. 이번에 주 씨가 하는 일은 설날을 전후한 2주 동안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주 씨가 명절이나 공휴일 연휴에 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런 기회가 올 때마다 고속도로 휴게소, 인바운드(전화 접수원)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작년에는 백화점에서 설날 선물세트를 파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설 연휴 알바 시급은 대개 평상시보다 1.5배 정도 받고 택배일과 같이 힘든 일은 2배가 넘는 시급을 받는다. 주 씨는 “대학생이 된 이후 명절 알바를 빠지지 않고 했는데, 일주일 정도 빡세게 일하면 돈은 한 달 일하는 것만큼 받게 되요”라고 말했다. 주 씨는 이 돈으로 월세와 학비에 보탠다.

서울의 한 국립대를 졸업한 박모(29) 씨도 이번 명절 때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명문대 법대를 졸업한 박 씨는 3년 전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매번 아쉽게 떨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천재 소리를 듣던 박 씨가 사법고시에 계속 떨어지자, 그는 자존심이 상해서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친척들을 만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친척들을 만나서 대화하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는 “시험에 계속 집중할 것이다. 시험에 붙은 다음에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작년 추석 명절 연휴에 고등학생 이모(18) 양은 꾀병을 부려 친척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사촌들이 대부분 자신과 나이 또래가 맞지 않는다. 위로는 30대 사촌 오빠들이 4명이 있고 아래로는 초등학생 사촌 동생들이 5명이 있는데, 자신은 어느 무리에도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친척집에 갈 때마다 이 양은 자신이 소외되는 듯했다. 이 양은 “같이 어울리기가 쉽지가 않아요. 가서 하는 거라곤 앉아서 어른들 대화 나누는 것 듣고 있는 것, TV보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어요. 너무 지루하고 따분해요. 그냥 집에 있는 게 더 편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 양의 경우, 아직 어려서 부모님 손에 끌려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오기도 하지만, 부산의 사립대에 다니는 강모(24) 씨는 고향으로 오라는 부모의 의사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휴식시간을 갖고 싶어 내려가지 않았다. 강 씨는 설날을 맞이해 여자 친구와 함께 지리산으로 2박 3일 여행을 갔다. 강 씨는 “설날 때는 팬션 가격이 싼 편입니다. 이 때 놀러가는 게 대학생 입장에선 현명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요새는 부모님보다 여자 친구와 잘 지내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강 씨처럼 명절 연휴에 놀러가는 ‘명절여행족’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명절여행족들을 붙잡기 위해 강원도를 비롯한 제주 지역 팬션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숙박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내놓기도 한다.

불행한 가족 상황 때문에 명절 때 친척들 모임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공모(24) 씨는 올해 가족과 함께 친가인 포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작년 가을에 이혼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엄마와 떨어져서 아버지와 따로 살게 된 공 씨는 본가와 외가 어느 쪽에도 가지 않았다. 공 씨의 아버지가 친척들을 볼 면목이 없어 고향 나들이를 포기했던 것이다. 원래 공 씨네 가족은 매년 설날과 추석 때 고향을 찾아 친척들과 화목하게 모임을 가졌지만 가정 파탄이 이 모든 행복을 앗아갔다. 공 씨의 고모인 신 씨는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 안타깝게 생각해요. 매번 봤었는데 당분간은 만나지 못하게 될 거 같아요”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교통 문제로 고향을 찾지 못하는 가족들도 있다. 부산 해운대에 거주하는 대학생 임모(25) 씨는 고향이 제주도다. 하지만 임 씨네 가족은 큰집이 있는 제주도에 가지 않고 부산에 남아 가족들끼리 설날을 보낸다. 임 씨네 가족은 배와 항공기를 통해서 고향인 제주도로 갈 수 있지만, 12시간이나 걸리는 배를 타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멀미가 심해서 어렵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제주도로 가려면, 한 사람당 7만원 하는 비행기값이 4명 가족이 왕복할 경우 60만원에 육박한다. 임 씨 아버지는 “그래도 제주도에 친척들이 많아서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연휴를 잘 보내시고 계셔서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고 말했다.

이처럼 친척들이 한두 명씩 빠지는 모습에 가장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른들이다. 밀양에 거주하는 권공자(74) 할머니는 “손주들 얼굴 보기가 쉽지가 않다. 다들 공부하고 일하느라 바쁘게 지내는 것 같은데, 그래도 내려와서 밥이라도 먹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형제 중 첫째로 큰집인 직장인 신모(56) 씨도 젊은 조카들이 명절 때 차례에 참석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이 크다. 신 씨는 “과거에는 군대를 가지 않는 이상 젊은 애들이 빠진 적이 없었다. 지금은 취직한다, 공부한다며 설 연휴 때 찾아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지는데, 그런 사소한 이유로 제사를 지내러 오지 않는다는 건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산의 박모(52) 천주교 신부는 사람들이 설날을 조상을 모시는 날보다 휴일로 보는 경향이 최근 늘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연대감이 축소되는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명절을 가족들이 함께 보내는 것이 가정의 평화, 가족 간의 연대를 쉽게 이룰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명절 고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바람직한 설날의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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