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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신탁통치 그리고 ‘금 모으기’…한국경제 지금은 안녕하신가강동수의 자투리시사인문(22) IMF 관리체제 20주년에 되돌아보는 한국 사회의 과제

1.

편집국장 강동수

1997년 12월 3일, 지금으로부터 꼬박 20년 전인 그날 TV를 향한 전 국민의 시선은 IMF와의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하는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입에 꽂혀 있었다. 그때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가 그의 옆에 서서 임 부총리의 발표 내용을 듣고 있었다. 21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는 대신 우리나라의 경제 주권이 IMF의 손으로 넘어갔고,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요구받게 된 순간이었다.

당시 기자였던 나 역시 착잡한 심경으로 그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국가 부도 위기의 한파는 바로 나,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몰아닥쳤다. 직장의 동료 기자 수십 명이 속절없이 잘려나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고, 임금이 사정없이 칼질 당했던 그 겨울의 참담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디 나만 그랬겠나. 크고 작은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직장에서 잘려나간 사람들이 줄을 섰던 세월이었다. 글쎄,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체를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하루아침에 파산해 거리의 노숙자로 떠도는 이들의 사연도 심심찮게 언론에 소개되곤 했다.

미셀 캉드쉬  당시 IMF 총재(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20년 전의 그날을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자.

IMF 관리 체제로 들어간 것은 1997년 12월 3일이지만, 그 서막은 그 2주 쯤 전에 열렸다. 11월 21일 밤 10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정부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기업 연쇄부도에 따른 대외신뢰도 하락으로 단기자금 만기연장 등 외화 차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금융·외환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유동성 조절 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외환 유동성 위기를 알리는 각종 지표 앞에서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이 있은 지 겨우 20여일 후였다.

2011년 그리스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그리스 군중(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김영삼 정부는 IMF와 줄다리기 협상을 벌여 IMF으로부터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고 세계은행(WB)에서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40억 달러를 지원받는 등 총 350억 달러를 긴급 차입하기로 했다. 대신 IMF는 우리 정부에 혹독한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대우그룹과 한보그룹, 삼미특수강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이를 용인한 관치 금융, 분식회계 등 숨겨진 부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법제도가 도입됐다. 1997년 말에는 1만 7000여 개 기업이 사라졌고, 조흥은행, 제일은행, 상업은행, 서울은행, 한일은행 등 33개였던 시중은행은 16개로 줄었다. 주식 시가도 반 토막이 났다. 95년 WTO가 공식 출범될 당시에 1200선 가까이 갔던 코스피 지수는 IMF와 구제 금융을 합의했던 97년 12월에는 400선을 밑돌았고 이듬해 6월에는 280까지 떨어졌다.

국민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1996년 2.0%이던 실업률은 1997년 2.6%, 1998년 7.0%로 급상승했고, 실업자 수는 1997년 56만 8000명에서 1998년 149만 명으로 3배가량 늘었다. 실직, 갑작스러운 생활고에 대한 충격과 고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국민들의 기억 속에선 지금도 ‘IMF 외환위기’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국 만1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외환위기가 국민들의 인식과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자의 57.4%가 한국 경제의 가장 어려운 시기로 ‘IMF 외환위기’를 지목했다고 한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군가 내게 해방 이후 한국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을 들라면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1997년의 외환위기를 세 번째로 꼽겠다.

 

2.

디폴트(default) 또는 채무불이행(non payment)이란, 기업이 공채나 사채, 은행 융자 등을 받았다가 이자나 원리금을 계약대로 상환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정부가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을 정해진 기간 안에 갚지 못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국가 부도 사태인 거다. 문제는 국가 디폴트 사태가 되면 그 고통이 국민 모두에게 떨어지는 거다. 군대도 다녀오고 세금도 열심히 냈는데 정부가 재정 운용을 잘못해 하루아침에 국민 모두가 ‘알거지’ 신세가 된다면 그야말로 악몽이다. 그 가장 생생한 사례가 그리스가 아닌가.

그리스 위기의 원인은 다들 아는 대로 과다한 사회복지비의 지출, 국가회계의 분식회계 처리, 그리고 관광업에 의존한 취약한 산업 구조다. 2007년까지 6년 동안 그리스의 재정 지출은 87%나 늘어났지만 수입은 31% 늘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공무원이 전체 노동자의 1/4 수준, 퇴직 후에도 현직 때의 90% 수준의 연금을 받았다. 한마디로 정부 재정의 방만 운영이 체질화됐던 것. 관광업이 잘 나갈 때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2009년 이후 관광산업 수입이 줄어들면서 나라 경제가 결딴나고 만 거다. 그리스 정부는 국제금융자본에게 손을 벌려 재정적자를 메우려 했지만 그게 오히려 국가 몰락을 부채질했다. 국가부도 위기가 현실화되자 국민들이 서둘러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면서 금융 위기가 가속화됐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정부는 무지막지한 공무원 해고, 연금 삭감을 단행했다. 오랫동안 좌파정부들의 선심성 정책에 젖어 있던 국민들의 충격이 클 수밖에. 2012년 6월 국회의사당 앞에서 권총 자살한 은퇴 약사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77세의 디미트리스 크리스툴라스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광장에서 외쳤던 한마디는 “자식에게 빚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였다.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된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품위 있는 노후를 위해 지난 35년 동안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연금을 부었는데 정부가 생존에 대한 모든 희망을 무너뜨렸다…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기 전에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다.”

오랜 고통 끝에 지금 그리스 사태는 진정 기미를 보이고는 있다. 2015년 정권을 잡은 급진 좌파 연합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제 채권단의 구조 개혁 협상안을 국민 투표에 회부했다가 국민들의 거부로 혼선을 겪기도 했지만, EU의 도움과 재정 개혁의 결과로 상황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그리스는 2010년 이후 유로존으로부터 3차례 구제 금융을 통해 2700억 유로를 지원받았다. 재정 위기가 끝난 건 아니지만, 바로 엊그제 그리스와 유로존 채권단이 3차 구제금융 이행안에 잠정 합의했다는 뉴스도 날아들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의 내년 8월 구제금융 프로그램 졸업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리스 경제가 제 궤도에 오를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지금까지 단계에 오기까지 그리스가 치러야 했던 출혈은 엄청나다고 할밖에.

 

3.

IMF 체제 아래서 김대중 정부는 대폭적인 수술에 들어갔다. 한국 경제는 큰 폭의 금리 인상, 구조조정, 공공재의 민영화 등 각종 굴욕적인 조건을 견디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리고 약 4년 만에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갚고 IMF 체제에서 졸업했다. IMF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빠른 위기 극복이었다. 한국 경제의 엄격한 감독관이었던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도 놀라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는 지난 10월10일자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정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됐을 뿐만 아니라 안정된 기반을 다졌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글로벌 경제는 정보기술(IT) 거품 붕괴,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국가들의 재정파탄 등으로 상당한 경제적 충격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외부 충격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성장을 이어갔다. 물론 외환위기를 유발했던 모든 문제점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IMF 총재 시절 예상했던 수준을 뛰어넘었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이른바 ‘금 모으기 운동’ 말이다. 97년 12월 1일 여성단체의 ‘금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촉발한 ‘금 모으기 운동’은 국민 캠페인으로 확대되며 총 227t의 금(당시 약 22억 달러 상당)을 모았다. 이렇게 모인 금은 해외로 수출돼 부족했던 외화를 확보하는 데 쓰였다. 나랏빚을 갚기 위해 국민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자발적으로 내놓는 장면은 해외 언론이 앞 다퉈 보도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사진: 한겨레 신문 1998년 1월 13일자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2015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그리스 등에서 당시 긴축 재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오히려 금 사재기와 외화 빼돌리기가 벌어지자 “한국을 배우자”는 기사가 외신에 잇따라 등장하기도 했던 터다. 금 모으기 운동이 실제로 외환위기 극복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전문가에 따라 의견이 다르기는 하지만 국민의 단합된 극복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터다.

하고 보면, 위기 때 힘을 보인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었다. ‘금 모으기’ 운동도 선례가 있는 것이다.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해 전개된 ‘국채보상 운동’이 그것이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게 적극적으로 차관을 주었다.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00만 원의 차관을 주었는데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됐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편 데는 물론 암수가 있었다. 한국의 재정을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한편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자는 것.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일본은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들여왔다.

그러자 민간 자발적인 국가채무 보상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1907년 2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했던 것. 국채보상운동 발기 소식이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된 데 이어 전국에서 20여 개에 이르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됐던 것.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 운동에는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고종도 단연의 뜻을 밝혔고, 고급 관료들도 소극적이나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민족 자본가와 지식인층이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층이 각종 패물을 의연소에 보내 온 대목. ‘서울 상사동의 이 씨 부인, 패물을 팔아 신화 2환을 보탬. 약방 기생 39인이 “비록 여자 중 천인이나 국가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며 신화 24환을 합동으로 보탬. 대안동 어느 관리 집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일하는 가난한 강 씨 부인이 품값으로 받은 4원을 보탬’ 등등 당시 신문들이 보도한 의연 활동을 보면, IMF 위기 당시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내놓으려고 줄을 선 후배 세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까지도 적극 참여해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돼 나갔다.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음해로 이 운동은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족적 의기만은 높이 평가돼야 할 일이다.

 

4.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지 20년이 넘은 지금, 우리 경제는 안녕하신가. 글쎄, 대외적인 지표론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102억 8000만 달러 적자였던 경상수지는 올해 3분기까지만 933억 8000만 달러 흑자로 바뀌었고, 외환보유액은 거의 100배 가까이 늘어난 3872억 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신용등급도 일본보다 높아졌다. 1인당 국민총생산액도 3만 달러를 곧 넘길 것이라 하고, 수출증가율도 세계 10대 교역국 중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국민들이 힘 모아 위기를 극복한 결과이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일까.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아직도 높다. 조선·자동차·반도체 등 주력 산업은 물론 미래 4차 산업의 경쟁력이 중국 등에 위협받고 노동시장은 개혁의 무풍지대로 경직된 구조가 오히려 더 강화돼 가고 있어 ‘제2의 개혁’을 하지 않으면 다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97년 당시 한국의 유동성 위험성이 되풀이 경고됐을 때도 정부 당국자는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탄탄하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그랬다가 국민 모두가 하루 아침에 뒤통수를 맞은 거다.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었던 이현재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당장 시장이 붕괴했기 때문에 시장이 어떻게든 작동하도록 해야 했다. 소위 말하는 위기의 ‘조기 졸업’은 성공했다. 그러나 위기 극복 후의 체계적인 관리 체제를 마련·집행하는 것이 미흡했다. 그래서 미완의 개혁이다. 우리 모두가 외환위기를 빨리 끝내고,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IMF 체제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기업들은 돈주머니를 죄고 이익을 쌓아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글쎄, 방만 경영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기업의 도전 정신이 사라지고 투자가 부진해지는 부작용을 낳은 셈이기도 하다. 그것이 고용 정체로 이어지고 청년 실업 문제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노동시장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왔다. 경직된 한국 노동시장을 부드럽게 만들라는 IMF의 요구에 따라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와 ‘근로자 파견법’이 도입됐다. 이에 따라 상시적인 구조조정이 관행화되고 기업이 해고가 어려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른 소득 양극화 역시 한국 경제의 큰 고민이다.

사회적으로는 출산율이 크게 낮아지고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 최후의 사회안전망인 가정이 무너지면서 개인과 가족 우선주의를 강화시켰고, 친족, 이웃 공동체조차 깨진 지 오래다. 한국 사회는 저신뢰 사회로 접어들고만 것이다.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경제 성장의 효과가 대기업에게만 쏠리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 기업의 투자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늘리는 일, 복지 제도의 확충을 통해 사회 안전망을 정비하는 일,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차원의 산업화 시대에 대비하는 일……. 성장 엔진을 꺼트리지 않으면서 사회 전 분야와 각 계층에 성장의 영양분이 골고루 전달되도록 실핏줄을 계속 뻗쳐가는 ‘두 마리 토끼 잡기’가 쉬울 리야 없겠지만 그게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과거를 잊는 민족에겐 내일이 없다’는 오랜 경구가 있다. 아직도 국민의 트라우마로 남은 20년 전 그날의 아픔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대통령도,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모두 각성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지난해 벌어졌던 국정농단 사태 따위로 국가와 사회 전체가 혼란을 겪어선 안 될 일이 아닌가.

IMF를 극복한 한국인의 잠재력을 놀라워했던 미셸 캉드쉬 전 IMF 총재가 남긴 충고를 모두 기억해야 할 때다.

“(한국에서) 1997년과 같은 방식의 유동성 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낮지만 새로운 구조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빠른 고령화, 노년 빈곤층 확대, 소득 양극화, 노동 시장 왜곡 등이 뇌관이 될 수 있다. 몇몇 분야의 취약한 산업 경쟁력, 높은 가계 부채 등도 생산성 약화를 유발하는 요인들이다. 향후 10년 안에 또 다른 금융 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점을 외면하면 안 된다. 유동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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