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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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국가다”
  • 장동범 시빅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4.01.2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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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그렇다!//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그렇다니깐!//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그랩…//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래//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허긴 그래.”

이 시는 1972년 독재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절, 함석헌 선생이 펴낸 잡지 <씨알의 소리>에 실려 경남 마산의 토박이 이선관 시인(1942~2005)을 일약 저항시인으로 전국에 알린 시 <헌법 제1조> 전문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과정에서 반어법과 역설로 당시의 권력과 정치 현실을 비꼬아 풍자하고 있다. 40년도 더 지난 이 시가 새삼스레 기억에 되살아나는 것은 최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한 일련의 문화 현상 때문이다.

개봉한 지 보름도 채 안 돼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은 1981년 ‘부림(釜林)사건’으로 부르는 부산 양서조합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지금은 대학생이라면 교양 필독서에 해당하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을 젊은이들이 읽고 모여서 토론했다고 해서 경찰을 비롯한 공안 당국이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강제로 허위 자백을 받아 처벌하는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영화 말미에는 법정에서 주인공인 변호사의 이런 대사가 나온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헌법 제1조 2항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주인은 권력을 쥔 자나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고,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요체인 주권재민(主權在民)을 강조한다. 특히 국가라 함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정부기관으로 대표하는 줄 알았는데 국민이 곧 국가임을 강조한 부분이 이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면서 암시하는 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국민의 내재적 갈망이 그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정부와 대사관이 자국민이 타국의 공항에서 붙잡혀 연행되고 말도 통하지 않는 프랑스령 외딴 섬 교도소에서 수개월 째 폭행과 함께 감금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마저 취해주지 않았던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영화를 본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요즘 TV 사극은 역사적 사실(fact)을 바탕으로 허구(fiction)를 가미한 이른바 팩션(faction)이 대세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지나친 퓨전 판타지화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최근 선보인 정통사극 <정도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개국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기에 백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민본(民本) 정치’를 구현하려는 정도전의 이상적인 리더십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드라마 제작 노트는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라는 정도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반면 얼마 전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묘사한 <뿌리 깊은 나무>라는 TV 사극에서는 정도전의 이상주의를 정치에 실현하려는 비밀조직 우두머리가 “글자는 무기다. 칼보다 창보다 유황보다 무서운 무기다.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는 양반집에 태어나서가 아니다. 그런 혈통 때문이 아니라 글을 알기 때문에 사대부인 것이야. 그게 사대부의 권력이요 힘의 근거다. 헌데 이 글자(한글)라면 모두가 글을 읽고 쓰게 된다면 조선의 모든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세상은 혼돈에 가득차고 이 조선의 뿌리인 사대부가 무너질 것이야”라며 사대부로 통칭되는 양반, 지식인들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교의 성리학이 지배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오늘 날 엘리트 정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그리스어 demos(people)+kratia(by)에서 비롯됐다 한다. 국민에 의해 행해지는 정치가 곧 민주주의이며,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選良)들의 국민을 위한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먼저 선출과정의 정당성과 투명성이 보장돼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 정보기관의 여론 조작과 군 정보기관의 사이버 여론 조작 개입이 정치 쟁점화 돼 내홍을 겪고 있는데서 보듯 민주주의란 결과보다 절차적 과정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최근 세계적인 사진잡지였던 <라이프> 사진전을 보러갔었다. “하나의 역사, 70억의 기억”이라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900만 장의 스틸 사진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나간 포토저널리즘의 역할과 힘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이 잡지가 지난 2007년 폐간해 아쉬움이 큰 전시회였다. (<라이프> 지로 대표되는 인쇄 미디어의 사양화를 표현한 최근 영화로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있다.)

특히 전시장의 각 코너 중 유달리 눈길을 끈 것은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는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경구(警句)와 함께 전시된 한 장의 사진, 바로 전쟁보도 사진으로 유명한 칼 마이던스 기자(1907~2004)의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였다. 사진은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가슴을 맞고 서거한 경교장 2층 창문의 선명한 총탄 자국과 함께 창 밖에서 엎드려 절하며 오열하고 있는 수많은 흰옷 입은 조문 인파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사진은 <라이프>지 1949년 7월호에 실려 대한민국 근대 정치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족의 참된 지도자를 누가 시켜 암살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근대 국가의 정통성을 김구 선생이 주석으로 있었던 상해 임시정부에서 찾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오랜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하기 위해 때로는 무력 항쟁까지 불사했던 김구 선생이 한없이 소망하는 우리나라는, 그러나 남의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자기 나라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고 국민의 생활이 풍족할 만하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였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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