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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의 영수증’은 ‘그뤠잇’, 욜로와 롱패딩 등골 브레이커는 ‘스튜핏’/ 발행인 정태철

<인생의 작은 교훈 책(Life’s Little Instruction Book)>이란 책이 있다. 한국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는 잭슨 브라운(H. Jackson Brown, Jr., 가수 Jackson Browne이 아님)이란 미국의 작가가 대학에 입학해서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평소에 메모해 모아 놓은 인생의 교훈을 적은 노트를 선물한 것을 나중에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였다.

영문 책은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소책자 크기인데, 1번부터 시작해서 511번 교훈으로 끝난다. 511개의 교훈 모두 한 줄 내지는 두세 줄에 불과하게 아주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1번은 “매일 세 사람을 칭찬하라(Compliment three people everyday)”, 2번은 “개를 키워라(Have a dog)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 책이 영어 배우는 데 좋다고 해서 비영어권 대학생들은 일부러 영문을 구해 읽는다.

<인생의 작은 교훈 책(Life's Little Instruction Book)> 영어 원본은 한 손에 잡히는 소책자다(사진: 필자 제공)

투표를 꼭 하라든지, 담배를 피우지 말라든지 하는 당연한 교훈도 있고, 어떤 것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선뜻 동의가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간단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교훈이 꽤 많다. 그중 “샤워하면서 노래를 불러라”라는 교훈이 있다. 나는 이 교훈을 읽은 다음날부터 실제 샤워하면서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랬더니 그날 기분에 따라서 노래가 잘 나오는 날이 있었고, 전혀 노래 부르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 뒤, 이 말의 참 의미는 날마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보람 있고 알차게 하루하루를 살라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후 나는 아침에 샤워할 때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어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습관처럼 반성하게 됐다.

이 책의 교훈 중 좀 의아한 것이 한 개 있었다. 그것은 “비싼 차를 몰지 말고, 집은 능력이 허락하는 한 최고 좋은 집을 사라”는 것이었다. 왜 차에는 돈을 쓰지 말고, 집에는 돈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쓰라고 했을까? 이 말은 마치 차에는 절약하고, 집에는 사치를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상반된 기준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말을 학생들에게도 질문으로 던져봤고, 사석에서 친구들에게도 대화 소재로 던져 보기도 했다. 대개 사람들의 생각은 집과 차의 구매 기준이 공통적으로 실용성에 있다는 것이었다. 차는 가기만 하면 되는 기계에 불과하므로 싼 차를 사는 게 실용적이고, 집도 우리 가족이 날마다 편하게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므로 살 능력 있으면 좋은 집을 갖는 게 실용적이지 않느냐는 의미의 해석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맞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이 교훈의 의미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모는 차는 남이 다 본다. 직장 사람도 내 차를 보고, 하다못해 길에서 내 차 옆을 지나가는 생판 모르는 사람도 내 차를 본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은 초대하기 전에는 남이 절대로 내가 어디에는커녕 어떤 집에 사는지도 모른다. 차는 남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집은 남의 시선과 상관없다. 다시 말하면, 이 교훈의 깊은 뜻은, 차는 남 의식해서 쓸 데 없이 낭비하지 말고, 집은 남이 보지 않지만 우리 가족의 편안함과 행복을 위해서 최대한 돈을 쓰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외형이나 겉멋보다는 실속이나 내실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우리 젊은이들과 수많은 한국 성인들의 행동은 남의 시선이 우선이다. 차에는 투자를 많이 하고, 집에는 적게 한다. 한국 젊은이들은 ‘헬조선’에서 어차피 집 사기는 어려우니 차나 좋은 것 타자며 겁 없이 3000-4000만 원씩 빚을 내서 중형 국산차 값과 비슷한 소형 외제차를 사는 경우도 있다. 외제차 딜러를 하는 제자는 무리하게 외제차를 사는 젊은이들이 최근에 많이 늘었다고 전했다. 빨간색 미니 쿠페나 폭스바겐 비틀 같은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 제법 폼이 날 것이다. 그러나 고액 월급쟁이가 아니고서는 월급의 대부분이 차 월부값으로 빠질 게 뻔하다. 그리고 성인 어른들은 남이 어디 사는지 알 수 없으니 비록 집은 서민 아파트에 살지라도 남이 보는 차만큼은 기죽지 않고 폼 나게 외제차 한 번 타보자는 성향이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 벤츠가 독일보다 더 많다는 농담도 항간에 떠돈다. 

한 때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노스페이스’라는 패딩 브랜드가 계급을 나눈 적이 있었다. 얼마짜리 패딩 점퍼를 입느냐에 따라서 ‘최하 계급’ 또는 ‘대장 계급’으로 불렸다. 아이들은 남이 다 보는 패딩 점퍼를 대장 계급으로 사달라고 부모들에게 졸랐고, 그래서 패딩이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그 외에 가방, 운동화, 스마트폰, 테블릿 PC 등이 속속 계급을 나누는 등골 브래이커가 됐다. 최근 여고생 사이에는 싼 화장품을 바르면 ‘오크(괴물) 계급’, 그 다음 비싼 것을 바르면 ‘휴먼 계급’, 외제 화장품을 쓰면 ‘엘프(요정) 계급’으로 불린다고 한다. 모든 등골 브레이커 아이템들은 다들 남이 빤히 보는 제품들이다. 대학생이나 어른들의 시선 중심 인생살이는 그 뿌리가 이렇게 깊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주부 청취자가 보내온 편지 사연에 이런 게 있었다. 여고 시절, 아파트 경비하는 아버지에게 최신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다가 아버지가 돈 없다고 하자, 홧김에 “핸드폰 사줄 돈도 없으면서, 왜 자식은 낳았어?” 하고 대들었단다. 바로 아버지에게 따귀를 한 대 맞았고, 그 길로 제 방에 들어가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 울다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자기 머리맡에 핸드폰이 놓여 있더란다. 나중에 아버지가 핸드폰 없이 다니는 것을 보고서 그게 바로 명의만 바꾼 아버지 핸드폰이었음을 알았지만, 자신은 모른 척하고 핸드폰을 신나게 들고 다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자신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고, 철이 들어 그때 일을 아버지께 사과드리려 했지만, 아버지는 연로해서 이미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행동을 나이 들어서 뉘우쳤지만,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최근 평창 롱패딩이 품절이 될 정도로 인기다. 드디어 롱패팅이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신종 등골 브레이커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본지, 2017년 11월 24일자, ‘평창 롱패딩 대유행....신종 등골 브레이커?’ 영상),

20대나 30대 등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흑수저, 헬조선, N포 세대라는 말이 나돌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에 경제적으로 윤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돈이 생기는 대로 다 써버리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런 소비 경향을 ‘시발 비용('시X'이라고 욕하면서 홧김에 왕창 소비하는 비용)’도 있고, ‘탕진잼(재물을 흥청망청 다 써서 없애는 재미)’라는 단어가 그런 경향을 엿보이게 한다.

최근 <김생민의 영수증>이란 TV 프로그램이 화제다. 이 프로그램은 한 인터넷 방송의 팟캐스트의 짧은 코너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게 인기를 얻어서 공중파 일요일 오전에 방송되는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내용은 남이 사용한 카드 내역서나 영수증 내역을 절약의 관점에서 분석해서, 낭비하면 ‘스튜핏(stupid)’, 현명한 소비에는 ‘그뤠잇(great)’이라는 일종의 추임새를 넣어 주는 것이다. 이게 유행어가 되었고, 주연 개그맨 김생민은 ‘통장 요정’으로 불리며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가 만든 “돈은 원래 안 쓰는 것”이라든지, “안 사면, 100% 할인 받는 것”이라는 어록은 히트 인기어가 됐다. 김생민은 유머 속에 쇼핑 절제와 저축의 미덕을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고 있다. <김생민의 영수증>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번지고 있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한 번 뿐인 인생 멋지게 살자) 풍조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30대에서는 점차 낭비에서 절약하는 풍조가 일고 있다고 한다. 30대들 중 과반수는 ‘현재의 즐거움보다 미래을 위한 준비가 더 중요하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뤠잇’이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물질적 욕망은 어려서부터 계속 상승하다가 40세를 고비로 하락하며, 반대로 정신적 욕망은 40세부터 상승하여 70세에서 피크를 맞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은 비록 가짜일지라도 남 보기에 명품 브랜드 아닌 게 없다고 한다. 남이 어떤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다 보는 핸드백을 명품 아닌 걸 들고 다닐 배짱이 없는 것이다. ‘스튜핏’이다. 소비가 미덕이란 말은 자본주의의 원칙이지만, 자신이 그 원칙에 합류해야할 소비 계층인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한다. 잘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 돈을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젊어서 물질적인 욕망의 화신처럼 살다가 40이 넘어도 그걸 깨닫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스튜핏’하게 후회할 것이다. 인생이 길어지고 있다. 길고 긴 인생의 끝을 웃는 자가 진정한 ‘그뤠잇’이다.

잭슨 브라운의 인생 교훈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일을 더 크게 하지 말고 더 좋게 하라(Focus on making things better, not bigger!" 이를 김생민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다. "일을 (양적으로) 더 키우면 '스튜핏', (질적으로) 더 좋게 하면 '그뤠잇!'" 

발행인 정태철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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