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을 넘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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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을 넘어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 박시현 시빅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3.12.23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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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아나운싱을 가르치는 나는 학생들과 자주 1분 스피치 연습을 한다. 학생들은 수 십 개의 단어 중 즉석에서 하나를 뽑아서 1분 동안 그 단어를 주제 삼아 말해야 하는 게 1분 스피치의 규칙이다. 1분 스피치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참여 학생들이 돌아가며 단어를 하나씩 뽑았다. 그 중 선택된 단어 하나가 ‘세모(歲暮)’였다.

당연히 섣달그믐을 뜻하는 그 단어를 보고 한 학생이 동그라미나 네모와 같은 도형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배꼽을 잡았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아무튼 세모는 일본식 한자라 하여 요새는 ‘세밑’으로 순화해 쓰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1분 스피치 주제로 이 단어를 뽑았다면, 과연 어떤 내용으로 1분을 담아낼까?

해마다 12월이면 언론이나 인터넷 공간에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한다. 부산을 비롯한 전국 시내 한복판에 올해 세밑에도 빨간 냄비가 걸렸다. 구세군의 빨간 냄비는 겨울의 전령사이기도 하고, 한 해의 반성을 촉구하는 세월의 지시이기도 하다.

세밑에 구세군 자선냄비의 유래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1891년 어느 겨울, 조난당한 한 척의 여객선이 장기간 표류 끝에 1000여 명의 승객들을 태우고 가까스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 때 구세군 사관이었던 조셉 맥피라는 사람이 며칠 간 망망대해에서 굶주린 이들 승객들의 배를 일시에 채울 방법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영국의 리버풀에서 다수의 빈민들을 도울 목적으로 거리에 내걸고 모금 운동을 하던 '심슨의 솥'을 기억에서 떠올렸고, 즉시 부둣가에 대형 솥을 걸어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라는 호소문을 붙였다고 한다. 이 호소문은 그 앞을 지나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솥을 음식으로 가득 채울 기금이 모였고, 마침내 그 솥으로 따뜻한 스프를 가득 끓여 1000여 승객의 주린 배를 채웠다고 한다. 오늘날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이렇게 굶주린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전 세계 사람들의 오붓한 마음을 모으고 있다. 나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유래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거리를 오가며, 또는 미디어를 통해 소외된 이웃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게 된다. 그런 사연이나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대부분 마음속으로 “저 사람 참 안되었다”거나 “불쌍하다”고 여긴다. 이런 마음은 일종의 동정심이다.

그런데 동정심은 동정심으로 그칠 수 있다. 동정심이 곧 남을 돕는 행동으로 이행되지는 않는다. 조셉 맥피가 가진 마음은 동정심 이상의 것일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닐까?

몇 년 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동정심과 측은지심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주인공의 할머니로서 자수성가한 노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동정심이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면, '측은지심'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손을 내미는 마음이야. 돈에 목숨 건 사람은 돈 없으면 지옥이고, 사랑에 목맨 사람은 님 못 보면 지옥이지."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심이 아니라 차마 돌아서지 못하고 손을 내미는 측은지심을 가진 사람만이 행동으로 남을 도와서 돈의 지옥에서 벗어나고 사랑의 천국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측은지심은 자신을 희생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행동인 것이다.

혹시, 나는 구세군 자선냄비 앞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동정심만으로 그냥 지나치는 부류였을까, 아니면 측은지심으로 자선을 실천하는 부류였을까? 며칠 전, 나를 부끄럽게 만든 것은 바로 빨간 냄비를 향해 걸어가는 어떤 꼬마 숙녀였다. 그녀의 고사리 같은 손을 통하여 구세군 자선냄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동정심을 넘은 측은지심이었다.

작년 자선냄비를 통해 모금된 돈은 모두 30여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1928년에 들어와 80년이 다 돼 가는 우리나라 자선냄비는 올해에는 핸드폰 기부도 가능하고 카드로 기부할 수도 있는 방식도 도입했다고 한다. 남 눈치 볼 것 없다. 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주머니에 동전 몇 푼이라도 잡히면 돌아서지 말고 손을 내밀어 보자. 저 빨간 냄비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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