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사람 중심 경제’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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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사람 중심 경제’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세계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7.10.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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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 자투리시사인문⑮ 동양고전으로 되짚어 보는 한국 경제의 과제 / 편집국장 강동수

1.

뉴스가 넘쳐나 뒤에서 덮치는 뉴스가 미처 일단락되지도 않은 먼젓번 뉴스를 밀어내는 게 우리 사회의 실상이다. 그렇긴 해도, 최근 뉴스의 홍수 속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한 뉴스가 하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한 ‘사람 중심 경제’ 선언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1일 ‘4차산업혁명위원회’에 참석해 ‘사람 중심 경제'를 위해 일자리와 소득 주도 성장, 혁신 성장, 공정 경제를 3대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혁신 성장‘이 소득 주도 성장과 함께 경제 성장을 위한 새 정부의 핵심 전략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고도 한다.

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은 기술적인 발전 뿐 아니라 개인 생활 방식, 고용 형태와 같은 사회구조 변화 등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사람 중심 경제'는 경제 정책의 중심을 국민과 가계에 두고, 성장의 과실을 국민들이 함께 누리는 경제를 말한다. 그런 바탕에서 그는 “4차 산업혁명 역시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능정보화사회로의 발전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바꿔주지만 일자리 파괴, 디지털 격차 등 또 다른 경제적 불평등의 우려가 큰 만큼 새로운 산업, 새로운 기업에서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정책을 모색해야 하며,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취약 계층이 변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해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적자생존의 정글’인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원리인 ‘경쟁’의 비정함을 넘어서서 인간을 생산과 분배의 주체로 앞세우겠다는 야심찬 선언인 셈이다.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성을 다소나마 완화시켜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보면 ‘사람 중심 경제’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 독트린인 셈이다. 글쎄, 경제 전반에 새로운 해법이 적극 도입될지, 아니면 그저 말의 성찬, 구두선(口頭禪)으로 끝날지는 아직 모른다. 어쨌거나 그 의미조차 모호하다는 평가 속에 결국 좌초하고 말았던 박근혜 정권의 ‘창조 경제’ 슬로건을 답습해선 안 될 일이겠다.

 

2.

‘사람 중심의 경제’라 하니 무슨 말인지 대강은 알 것 같으면서도 선뜻 그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IMF 관리 체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마이너스 방향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겪어오지 않았던가. 기업 경영이 악화되면 정리 해고를 손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나 공공 민간 할 것 없이 산업 전 분야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전 산업 분야의 자동화를 심화시켰고 그 여파로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노동 환경이 크게 악화돼 가는 것도 IMF 이후의 낯익은 풍경의 하나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가 거대 산업자본의 나사로 전락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글쎄, 일찍이 찰리 채플린이 무성영화 <모던 타임스>(1936년)에서 예언한 우울한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찰리 채플린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문명적 차원에서 보면 수천 년 전 동양의 선각자들도 기계에 지배당하는 먼 미래의 인간의 모습을 경고했던 터다. 그들이 수천 년 후 21세기 후손들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예측했던 건 아니겠지만, 지금 읽어봐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금과옥조가 될 만한 날카로운 통찰이 적지 않다. 생각나는 대로 일별해 보기로 하자.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우선 노자(老子)의 이야기. 노자 사상의 키워드가 ‘무위(無爲)’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노자의 ‘무위’라는 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이 아니라, 인위적인 그 어떤 속박도 가하지 않고, 있는 그 대로의 우주법칙인 자연(自然)과 합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소리다.

노자의 한 구절.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하여야 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채우게 하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하여야 한다. 언제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무엇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무위의 방식으로 다스리면 다스려지지 못할 것이 없다."

얼핏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온갖 상품들이 세상에 나오고 그것의 구매를 유혹하는 온갖 광고가 난무하는, 그리고 필요도 없는 허섭스레기 같은 지식들이 인터넷에서 넘쳐나는 오늘의 세태를 경계하는 말 같기도 하다.

중국 복건성 천주에 있는 노자 석상(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다음은 <장자(莊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한수를 지날 때 밭일을 하고 있는 노인을 봤다는 거다. 노인은 우물바닥으로 내려가 물동이를 안고 나와 물을 주고 있었다. 끙끙거리며 힘을 썼지만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자공이 노인에게 말했것다. “용두레라는 기계를 쓰면 하루에 백 이랑에 물을 줄 수 있습니다. 어르신은 그걸 왜 쓰지 않습니까.” 노인이 불끈 화를 내는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스승께 배운 바가 있네.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기계를 쓸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힌 마음이 생기지. 기계에 사로잡힌 마음이 가슴에 담기면 순백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네. 순백한 마음이 사라지면 정신이 불안정하게 되지.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도가 깃들 수 없다네. 기계를 쓸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차마 부끄러워서 기계를 쓰지 않는다네.”

노인이 내처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공자의 제자입니다.”

밭일하던 노인이 덧붙였다.

“그 사람은 많이 배워서 성인을 흉내 내고 허망한 말로 뭇사람의 눈을 가리며,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서글픈 노래로 천하에 명성을 파는 자 아닌가. 그런데 자기 몸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느 겨를에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인가. 자네는 가던 길이나 가게.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부끄러움에 낯빛을 잃고 멍하니 30여 리나 걸어 가서야 겨우 제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이야말로 기계로 대표되는 인위적 세계, 물질문명에 대한 통렬한 야유가 아닌가. 기계를 쓰면 인간이 기계에 매달리게 되며 결국은 타고난 본성을 잃는다는 거다. 현대인에겐 이 노인의 주장이 이해되지도, 납득되지도 않을 거다. 글쎄, 용두레를 쓰면 금방 일을 다 해치울 건데 뭐 하러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바가지 한 바가지씩 물을 퍼 담는단 말인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 아닌가.

하지만, 한편 뒤집어 생각해 보면 장자의 이 구절은 기계 문명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럼 그 노인이 기계를 써서 일을 삽시간에 다 해치우고 나면 남은 시간엔 뭘 하나?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이라도 잘 거다. 그러면 더 즐겁고 행복해질까. 글쎄, 나무 밑을 뒹굴면서 하루에 천 이랑에 물을 줄 기계를 만들 궁리나 하고 있을 거다. 그러다가 만약 그 기계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아마 그때 다시 물지게를 져야하는 고통은 처음 아무 생각 없이 땡볕에서 일할 때보다 백 배, 천 배는 더할 게 아니겠나.

장자의 호접지몽을 묘사한 그림(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다르게 비유하면 이런 것일 거다. 무궁화호를 타고 다섯 시간 넘게 걸려 부산에서 서울을 오가던 시절과 KTX를 타고 두어 시간 만에 서울에 닿는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 무궁화호를 타고 가면 엉덩이도 배기고 지루하기도 할 거다. 하지만,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책 한 권쯤 읽을 수도 있다. KTX를 타고 쏜살 같이 서울에 도착하면 무슨 일을 하나? 아마 절약된 시간만큼 사람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느라 정신없이 보낼 거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대느라 허겁지겁하지 않겠나. KTX를 타고 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하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나?

장자는 기계에 홀리는 마음을 ‘기심(機心)’이라고 불렀다. 기심은 또 다른 기심을 부른다. 따지고 보면 맹목적인 기술의 발전, 문명의 발전은 직진하는 셈이다. 그렇게 맹목적인 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를 자문해 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워진다. 돌멩이에서 창칼과 화살, 총과 대포, 그리고 핵무기와 ICBM으로 이어져온 무기의 발달사, 아니 문명 진보의 궤적을 살펴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글쎄, 이런 소리를 하면 반문명론자라고 욕먹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자연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리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인간의 농업 생산력은 인류 역사상 최고다. 인류의 2%만 농업에 종사해도 전체 인류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숱하게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편에선 비만이 불러일으킨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숱하고, 값이 안 맞는다고 멀쩡한 농작물을 광활한 땅에서 그대로 썩여버리는 판에. 결국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눈부신 현대 문명도 모래밭에 세운 누각일 뿐이 아닌가.

장자가 말한 ‘기심’은 다르게 말하면 ‘기계 문명에의 인간 소외’일 터다. 기계 문명을 다르게 풀면 ‘자본주의 체제’라 할 수도 있을 터. 자본주의의 동력은 눈먼 이윤 추구이며, 이윤 추구의 수단은 ‘상품 경제’ 혹은 ‘교환 경제’인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다. 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새 기계를 만들고, 그래서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은 이윤을 쌓으면 행복해지나? 죽으면 어차피 싸들고 갈 것도 아닌데.

찰리 채플린이 기막히게 그려낸 대로 ‘기심’은 새로운 기심을 낳는다. 그 무한 팽창의 직진로에서 인간은 기계를 개발하다 못해 인간 자신을 기계에 종속시키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본의 증식에 방해가 되면, 수십 년 일한 직원들을 ‘구조 조정’이란 냉혹한 단어를 동원해 하루 아침에 잘라내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면 노동자를 임금을 적게 주고, 어떻게 하면 쉽게 잘라내는 구조를 만들까에 골몰하는 게 현대사회의 기업들이 아닌가.

 

3.

아차차,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졌다. 문재인 식 ‘사람 중심 경제’가 인류사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속에서 나온 대안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일자리 확대와 소득 주도 성장, 혁신 성장, 공정 경제를 3대축으로 삼는 한편 경제 정책의 중심을 국민과 가계에 두고, 경제 성장의 과실을 국민들이 함께 누리는 경제를 만들겠다니 짐짓 기대를 걸어보는 거다. 기술적인 발전 뿐 아니라 개인 생활 방식, 고용 형태와 같은 사회구조 변화를 동반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겠다는 거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들의 캠페인을 지켜보면서 가졌던 의문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당시 안철수 후보가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되풀이 외쳤던 장면 말이다. 다가오는 미래 사회를 미리 대비하자는 주장이야 흘려들을 게 아니다. 안철수 후보의 주장은 어떤 측면에서 지당할 뿐 아니라 우리사회가 눈을 돌려야 할 화급한 과제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던바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안철수의 4차 산업혁명 대비론’엔 심각한 결락이 있었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는 건 좋다. 그런데, 그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사람은 누군가? 시민인가, 재벌, 혹은 대기업 집단인가? 그 4차 산업혁명의 과실은 그럼 누가 가져가는가? 노동자인가, 재벌인가? 그 4차 산업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을 함께 보듬고 갈 방안은 그럼 또 무엇인가.

안철수의 주장은 미래지향적이랄까, 인류에게 펼쳐질 새로운 역사를 미리 펼쳐 보인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엔 그의 주장엔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차가운 금속성’만 번쩍였을 뿐 ‘사람’이 빠져 있었다. ‘사람’이 빠진 문명론을 윤리적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을까.

자본에 의한 인간의 지배,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 구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본주의 체제를 깊이 관찰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칼 마르크스다. 저 유명한 ‘잉여가치설’에 따르면 기계가 가치를 생산하는 건 아니라지 않던가. 50원짜리 재료로 100원짜리 물건을 만든다면, 거기엔 공장이 들어선 땅값과 기계값, 전기료 따위의 불변자본과 인간의 노동력을 뜻하는 가변자본이 함께 들어간다. 그런데 재료비, 땅값, 기계값, 전기세 따위는 제 값만큼만 역할을 할 뿐 가치를 더 늘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물건 1개 만드는 들어가는 불변자본이 70원이라면, 노동력이 가치를 상승시킨 것이 30원이다. 그런데 자본주가 임금으로 10원을 주면 20원이 남는다. 그게 이윤이라는 거다. 그래서 자본주는 이윤을 더 남기려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쥐어짠다는 게 마르크스의 ‘노동착취설’인 거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칼 마르크스 동상(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 자체는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그 모순을 해결하는 대안이 문제였던 거다. 소유 자체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을 사회적 제도로 억지로 교정하고 구속하려는 과욕에다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 계급으로 나누어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으로 부르조아 계급을 타파하겠다는 것이 그의 후계자들의 혁명이론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분노와 증오의 사회학’이 풍미해 20세기의 세계가 심각한 몸살을 앓았던 거다.

반면에 자본주의의 발전을 합목적성에 의한 진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베버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겠다. 자본가들의 자본 증식 행위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목적 합리적 행위이나, 그 근간에는 가치합리성이 놓여 있다는 거다. 자본가들의 생산 행위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프로테스탄트(청교도)적 윤리관 때문에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거나 향락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이윤은 문명의 새로운 진보에 쓰인다는 거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노동의 합리적 조직(삶과 생활을 하는 태도)’이라고 한다. 노동 자체를 가치 있게 보고, 정직과 근면, 계획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다. 쾌락, 행복, 즐거움은 지양하고 절약과 검소함을 가져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게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거다.

하지만 막스 베버에도 함정은 있다. 청교도적 윤리의식으로 무장했다는 자본가는 그렇다 치고, 그럼 노동자는? 결국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분석에다 근면, 검소, 신앙 같은 종교적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을 자본 축적에 봉사하는 존재로 묶어 놓았다는 거다. 그가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지 못한 동양사회를 전문성과 직업윤리가 뿌리내리지 못한 미개발 사회라고 본 것도 그 때문일 터.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직업윤리와 전문성도 결국 노동생산성을 높이자는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것다.

글쎄, 다들 아는 이런 초보적인 경제 이론을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게 아니다. 마르크스도, 막스 베버도 아닌 제3의 길을 찾자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21세기 인류는 아직 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894년의 막스 베버(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4.

앞에서 말한 장자의 ‘기계론’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연전에 타계한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자의 기계론은 이처럼 기계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노동과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노동은 생산요소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세계에 있어서 노동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비효용으로 규정하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을 경제원칙이라고 합니다. 경제원칙은 장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기적이고 천박한 사고입니다. 고통과 방황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에 대해선 무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노동은 생존 수단이면서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란 이야기이겠다. 지구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수백, 수십만 년 동안 노동을 통해서 오늘날의 고도의 문명을 이루지 않았던가. 돌도끼를 들고 초원을 달리던 인간이 오늘날 달과 화성을 넘나들게 되기까지 전개된 노동의 역사야말로 장대한 드라마가 아닌가. 그런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노동을 그저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비효용으로 규정하는 현대 문명의 천박함 앞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은 없다.

노자의 말도 다시 떠올려 본다.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더 낮추기 때문이다(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글쎄, 이 세상 온갖 것을 다 포용하면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바다야말로 백성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보면, <노자>는 약한 것들이 강한 것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부국강병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던 춘추전국 시대에 노자와 장자의 이야기가 태어난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닐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말한 대로 과연 자본주의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 최고의 단계인지 무지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현대의 자본주의가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의 경제’ 선언 소식을 듣고 떠올려 본 상념이 너무 나갔다. 글쎄, 눈알이 핑핑 돌아가도록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에 노자와 장자라니. 백일몽 같은 소리나 뇌까리고 있다고 핀잔줄 사람도 있으리라. 하기야, 인간 욕망의 총화인 자본주의 체제는 그 얼마나 강고한 것인가. 하지만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 아닌가. 백일몽이라도 꿈꾸지 않는 삶보다는 나을 터.

‘사람 중심의 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구호가 그저 레토릭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사실, 아직은 선언 수준일 뿐 구체적인 정책 수단이 제시된 것도 아니다. ‘사람’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이 밑바탕에 과연 깔려 있는 것인지도 확언하기엔 이르다. 그래도, 젊은이들이 편의점의 시급 알바로 시드는 세상, 1000만 명에 육박한다는 비정규직이 해고의 위협 앞에 숨을 죽이고 있는 세상만은 손을 좀 봐야하지 않을까. 한 해 매출 실적이 270조 원에 이르고 영업이익이 50조~60조에 이르는 삼성전자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죽어도 기업주는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세상은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 해에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과로사로 죽고, 집배원이 스트레스로 잇따라 자살하는 세상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을까.

백일몽이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사람’이란 단어에 희미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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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2017-10-18 01:21:30
확인되지 않은 것을 믿는 종교현상은 학문 세계에서도 발생하는데 인문학은 물론 자연과학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종교와 현대물리학은 공통점이 있다. 종교가 확인이 불가능한 영적 세계를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물리학도 인간이 가볼 수 없는 먼 우주나 인식이 불가능한 미시의 세계를 논하므로 잘못된 이론이 통용되면서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오른 대한민국의 유명한 과학자들도 이 책에 반론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