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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나의 꿈은 외교관...국민학교 시절에 창씨 개명, 일본어 교육, 좌우익 싸움을 목격하다[제3부] 삶의 뜻을 생각하는 은퇴인 / 장원호 박사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10.1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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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할 때 창씨를 해야 한다고 하여 우리 집안도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집안은 일본에서 무사로서 명문을 이룬 장전(長田)으로 바꾸었고, 내 일본 이름은 장전풍치(長田豊治)로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후 1학년 때, 나는 모로이라는 여 선생의 특별한 귀여움을 받았고, 특히 그 반의 반장이 되어 주말이면 모로이 선생 집에 초청될 정도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사정이 바뀌어서 모로이 선생 등 일본인들이 전쟁포로처럼 기차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애국자가 된 듯 그들에게 욕을 해대는 동네 어른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국민학교 2학년 중반까지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해방 이후부터는 한글을 배우고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학교 교육을 타의에 의해 2개 언어로 교육을 받은 세대가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 지역에 붙은 창씨개명 공고문(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해방과 동시에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었습니다. 외삼촌이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다음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1930년대의 뜻있는 한국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국제 공산당에 가입한 뒤 공산당 이념보다는 민족주의 이념으로 투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자신 들이 새로운 조국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돌아 왔지만, 이들은 좌익과 우익 둘 중 한 세력에 들어가서 좌우익 싸움에 말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의 바로 직전 세대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이지만, 우리 세대에도 좌익 후손들은 외국 유학도 못갔고, 고시에 합격해도 법관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민족 역사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반탁데모(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해방과 동시에 우리 정미소는 더욱 성장해서 쌀, 보리, 밀가루를 처리했고, 나중에는 목화씨 가공에까지 사업을 확장해서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목화씨 기름을 생산했고, 해방 후에는 목화씨 기름을 비누 공장에 납품하는 등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나는 정미소집 큰 아들로 동네에서는 이름난 집 장남이 되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에 있던 과수원집 딸이 남 모르게 사과를 내 책상에 집어넣다가 친구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후 우리는 손 한 번 잡은 적도 없었으나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 사건도 기억이 납니다.         

또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학교가 우리 집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나는 점심 도시락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3분이면 집에 갈 수 있었고, 정미소를 하는 우리 집에는 항상 여러 가지 음식이 풍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이 큰 할머니가 계신 이상 그 어려운 보릿고개에도 나는 보리밥을 별로 먹지 않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집에 가보니 점심으로 먹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때 집에서 쌀로 만든 술을 짜낸 찌꺼기가 있었는데, 정미소 일꾼들이 장난으로 이 찌꺼기를 설탕에 타먹으면 좋다고 하여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시간 후, 나는 술에 취한 국민학교 4학년생이 되었고, 선생님에게 호되게 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역시 4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점심시간 후 나른한 봄철 오후에 최상철 선생님은 우리들의 장래에 대하여 각자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서슴 없이 장래에 외교관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는 유명한 사주 보는 친구들을 찾아가 나의 60년 운명을 써 받았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장래에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제 내 나이 80을 한참 넘었지만, 나는 외교관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면서 교육자로서 민간 외교관 노릇을 한 셈이니, 사주가 전혀 안 맞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반에는 이경수라는 음성면장의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경수는 거침없이 면장이 되겠다고 했는데, 그 친구는 불행하게도 고등학교 2학년 때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경수는 그때까지 우리 친구들한테 '면장'으로 불렸습니다. 경수의 익사 사고는 부모들의 책임이 컸습니다. 외아들이라고 물가에는 전혀 가지 못하게 해서 경수는 고등학교 때까지 수영을 전혀 못했습니다. 죽은 날, 경수는 수영 못한다고 놀리는 친구들 몰래 수영을 배운다고 명암 저수지에 가서 혼자 수영 연습을 하려고 물에 들어가자마자 익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의 슬픈 장례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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