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고, 들으며 부산의 근대사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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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고, 들으며 부산의 근대사를 배우다
  • 취재기자 김가희
  • 승인 2013.10.0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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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적 프로그램 ‘100년 전 부산 나들이’ 성황

평일 내내 책과 씨름하던 아이들이 주말을 맞아 교실 밖으로 나왔다. 가을의 맑은 하늘이 드높은 지난 토요일 이른 9시, 부산시 중앙동 부산 세관 앞은 주변 경관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초등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엄마와 손을 잡고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부터 정신없이 풍경을 둘러보는 아이까지 저마다 각자의 이름표를 목에 걸고 줄을 서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시계가 30분을 가리키자 “출발합시다!” 하는 선생님 소리에 아이들은 들뜬 표정으로 일제히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이렇게 부지런히 모인 아이들은 부산 역사를 체험하는 ‘100년 전 부산 나들이’ 행사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다. 이 체험 나들이는 부산근대역사관에서 아이들의 역사 산교육을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기획한 답사 프로그램으로 생동감 있는 학습을 원하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답사에 동행한 프로그램 담당자에 따르면, 이 같은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꾸준히 답사 코스를 연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는 “답사 참여 신청을 받기 시작하면 금방 정원이 다 차버릴 정도로 인기가 좋아 다른 사설 기관에서도 계속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또 부산근대역사관 차원에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있고 이 중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도슨트(docent·안내해설사)가 되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답사의 내용도 좋고 알차다고 한다.

이날 하반기 답사 4기 학생들은 한때 우리나라 중심이었던 부산 중구 일원의 문화 유적들을 돌아보는 코스에 참여했다. 아이들이 맨 처음 둘러본 곳은 부산세관본부 3층에 위치한 부산세관박물관. 전반 답사 해설을 맡게 된 이미현 도슨트가 부산항의 전경 파노라마 사진을 보여주자, 아이들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세관의 역사를 따라가던 몇몇 아이들은 꼼꼼히 수첩에 필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다 “강화도 조약은 몇 년도일까요?”하는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 학생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1876년이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곧이어 수출입 품목의 번호를 설명하던 선생님이 “99번은 바로 무시무시한 시체랍니다”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시체도 수출해요?”라고 물으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되는 설명에 궁금증이 생기면 엄마에게 “밀수가 뭐야?”, “매립이 뭐야?”라고 질문하며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모습도 보였다. 선생님을 따라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세관 건물의 뒤편에 세워진 첨탑 앞에 멈춰 섰다. 이 첨탑은 79년 도로 확장으로 사라져버린 옛 세관 건물에서 유일하게 남겨진 것으로 그때를 추억하는 엄마들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 부산 세관박물관에서 답사 4기가 옛날 세관복과 냉동운반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 김수연 취재기자).

이어 답사팀은 두 번째 코스인 40계단 테마공원으로 향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이동거리가 꽤 됐음에도 아이들은 선생님 뒤에서 처지지 않고 씩씩하게 걸었다. 모난 돌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살아나는 테마공원 길에 들어서자, 선생님은 멈춰 서서 설명을 이어갔다. 거리 곳곳에 보이는 조형물들 하며 40계단은 그 시대의 애환과 향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에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사뭇 숙연해졌다. 전후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선생님은 “얌생이꾼이 뭘까요?”라고 물으며 아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아이들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얌생이꾼은 항을 통해 들어오던 군수물자를 몰래 빼내던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또 “그럼 도떼기 시장은 뭘까요?”라는 선생님의 이어지는 질문에 한 엄마가 아이 대신에 “몽땅 다 파는 시장이요”라고 답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와 아이들은 그때의 테마거리를 직접 걸어보면서 그때의 애환을 느꼈다. 어떤 학생은 가던 길을 멈추고 부지런히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 40계단을 설명하는 이미현 도슨트와 테마거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황지현 학생(사진: 김수연 취재기자).

테마거리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사각뿔 모양의 백산 안희제 선생 기념관이 나왔다.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던 그의 숭고한 정신은 건물의 외관과 앞에 심어진 모과나무에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백산 선생이 일제 공작에도 불구하고 신교육 전파와 항일운동에 앞장섰다는 도슨트 이 씨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사뭇 진지함이 묻어났다. 기념관을 나와 용두산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아이들에게 조금 더 생소했다. 중구 일대는 대부분 매립을 통해 이뤄진 지형인데, 원래의 해안선이 어디부터인지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 선생님이 특별히 해안선으로 걷는 코스로 인도한 것이다. 골목은 이미 빽빽이 집들로 가득 차 과거 해안선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땀이 흐르는 더운 날씨였지만 씩씩하게 걸어가던 한 아이는 “감 잡았어!”를 외쳐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계속해서 올라가는 중에도 관수가, 개시대청 등 근대문화유적의 흔적들을 속속들이 만날 수 있었다. 후반 답사는 박은경 도슨트가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박 선생은 특히나 직접 현장을 돌아보며 배우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녀는 “요즘은 수능을 위한 역사 공부를 하다 보니까 막연히 외우는 공부밖에 되지 않았어요. 잊을 수 없는 역사를 체험 식으로 배우면 아이들의 애국심도 커질 겁니다”라고 덧붙혔다.

▲ 백산 안희제 기념관에서 설명 중인 이미현 도슨트와 초량왜관을 설명하는 박은경 도슨트(사진: 취재기자 김수연).

용두산 공원에 도착하자 하늘을 향해 우뚝 선 부산타워가 학생들을 반겼다. 부산타워에 올라가 부산을 내려다 볼 것이라는 담당자의 말에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신난 표정을 지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올라간 부산타워. 그 꼭대기에서 본 부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갈매기 형상의 자갈치 시장에서부터 새 단장 중인 영도대교와 북항대교, 쉴 새 없이 배가 드나드는 부산항까지 모든 경관이 엄마와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부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박은경 도슨트는 일제강점기 잊을 수 없는 역사에 대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일제시대의 잔재라는 이유로 허물어버린 건물의 위치를 아이들에게 짚어주면서 박 씨는 “일제시대의 건물은 허물어 버리는 게 좋겠니, 보존했으면 좋겠니?”라고 질문했다. 이어 그녀가 “얘들아, 선생님은 아픈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하고 기억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타워에서 내려오자 아이들 얼굴에 약간 지친 내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둘러보는 학생들은 현악기 음악도 듣고 직접 타악기도 두드려 보며 다시 힘을 냈다. 푸른 공기가 가득 찬 숲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힘들 법도 한데 아이들은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연신 떠들어댔다.

남천초등학교 5학년인 황지현 양은 이런 실감 나는 공부가 좋다고 했다. 황 양은 “아쉽고 희귀한 유적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다음에도 또 오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황 양의 어머니인 방문영 씨도 “학원 공부보다 직접 보고 듣는 공부가 아이한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길을 내려와 중구 대청로에 자리 잡은 부산근대역사관에 도착했다. 이곳은 답사의 마지막 코스이자 부산의 근대역사를 함축적으로 모두 담고 있는 건물이었다. 동양척식회사의 부산지사로 쓰였던 곳이라 겉모습부터 오래된 느낌이 역력했다. 과거 치욕스러운 강점의 역사와 우리나라 근대의 소중한 기록들을 동시에 담는 곳이라 그런지 묘한 분위기도 났다. 박은경 선생은 한국의 인력,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일본이 행했던 악행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녀는 “일본의 악랄한 짓들은 여러분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시금 아이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전시된 근대 거리까지 모두 둘러보고 난 답사팀은 근대역사관 내 도서관에 둘러앉았다. 박은경 도슨트는  “역사는 흐르니까 여러분 항상 이렇게 와서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근대 역사는 아픈 역사라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라며 답사를 마무리했다.

역사 체험 내내 씩씩하게 참여했던 남문초등학교 4학년 김진우 군은 다음에도 이런 체험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군은 “직접 유적지를 가면서 옛날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고 관련된 이야기도 들으니까 좋았어요”라고 덧붙혔다.

김 군의 어머니 이승은 씨는 아들을 위해 직접 이런 프로그램을 찾아봐 왔다고 했다. 이 씨는 “아이가 원래 역사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서 좋았던 것 같아요. 엄마랑 다닐 때는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니까 (아이가) 신기해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답사 내내 설명을 도맡아온 이미현 도슨트는 역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며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막연히 책만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직접 걸어보고 봄으로써 훨씬 이해력이 쉬워질 거예요”라고 말했다.

박은경 도슨트도 이같이 질 높은 체험 학습 프로그램에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당부했다. 박 씨는 “역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이런 눈높이 교육은 아이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해주기 때문에 정말 바람직한 교육”이라고 말했다.

부산근대역사관의 이번 하반기 근대문화유적 체험프로그램 ‘100년 전 부산 나들이’는 5일에 진행되는 5기 답사를 끝으로 하반기 프로그램은 마무리된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는 매년 상하반기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으며 참가비는 무료이다. 사정에 따라 코스가 변동될 수 있고, 학생들의 방학 기간에 맞춰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에 있다. 답사 관련 문의는 (051)253-38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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